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터키에 강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은 비극을 보면서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비극과 불합리를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무질서와 비통한 슬픔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흔히 이웃들의 슬픔과 고통을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출하고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자 하는 선한 양심의 호소를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인류애와 형제애 또는 자매애를 통하여 자연이 야기한 불행에 대해서 인간이 공유하는 공동선(common good)으로 극복하고자 한 미담에 대해 뿌듯함과 위로를 얻고자 하며 이러한 취지의 이야기에 의존하여 삶의 희망을 찾고자 한다.

이 생각의 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하고 전능한 신과 피조세계, 신의 선한 질서에서 벗어난 무질서와 혼란과 파탄과 고통, 이러한 파괴와 비극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러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들의 양심을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의 선한 행동과 공동선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으로 불행 속에서 작은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 안도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신성일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위로를 주는 스토리이자 신의 뜻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인간들의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몇 가지 면에서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괴리가 있다. 먼저 이러한 이야기와 질문에는 우리와 분리된 어떤 집단이 있고 이들에 대하여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 전에 그들과 우리라는 분리가 전제되어 있다. 둘째, 이러한 이야기 속의 화자와 독자는 자연적인 무질서와 비극과 신의 성품과 의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한다. 선이라는 신의 성품과 절대적인 신의 능력과 파괴적인 무질서와 비극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춘다. 셋째, 자연의 무질서와 무관한 제3자이인 “우리”들은 인간애와 인류애를 가진 양식이 있는 인간으로서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도움의 손을 내미는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선한 존재로 상정한다. 넷째, 우리와 신은 신이 우리에 내재(immanence)하고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와 동일화된 존재로서 관계맺는 상황을 상정한다. 피조물인 우리에 남겨진 신의 흔적 외에 초월적인(transcendent) 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기독교적 관점은 이러한 설명과 비슷하면서도 관점과 강조점이 사뭇 다르다. 첫째, 모든 인류와 피조물은 창조세계의 질서에서 하나로 묶여진 공동체이다. 저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연대성 속에서 하나의 가족이고 이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피조세계의 파괴는 곧 우리와 나의 부서짐이다. 인류와 피조세계의 연대성과 통일성을 깨뜨린 분리와 분열은 그 자체가 근본적인 타락의 결과이다. 이를 전제로 한 수혜와 시혜의 관계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던 간에 근본적으로 창조세계의 원형으로부터 벗어난 파괴와 타락의 결과를 내포한다.
둘째, 성서는 선하고 세계를 다스리는 신과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모순에 머물러있는 관심을 우리와 신의 관계와 우리와 죄악의 세계의 관계로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다. 비극과 부조리와 악의 원천과 결과에 대해서 나와 우리와 신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와 우리와 이러한 악의 결과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셋째, 자연과 세계의 무질서와 고통과 악과 우리들은 어떤 관계인가. 성서는 우리들은 신 앞에서 연대하여 공동악(common evil)을 저지르고 추구해온 타락한 존재임을 지적한다.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자극을 통해 카타르시스와 안도감을 느끼는 우리의 이기심은 인류의 공동의 신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으로 인한 죄의 결과이다. 이러한 죄의 결과 우리는 인간사의 다양한 도덕적 악(moral evil)의 결과를 낳고 스스로 또는 서로 고통받고 있으며, 자연세계의 무질서인 자연적인 악(natural evil)을 경험한다. 공동선이라는 옅은 신의 흔적 이전에 근본적으로 연대성에 기반한 공동악(common evil)을 추구하는 인류와 그 공동체에 포함되어 적극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인간이 바로 나이며 인간의 실체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넷째, 성서는 선한 창조와 피조세계의 파괴와 붕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있는 화자와 독자를 비극적이고 악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직접적인 관련자로 부른다. 세상의 죄와 악과 고통에서 벗어나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 고통과 비극의 현장에 내재하는 가해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무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악과 고통은 인류가 신에 대하여 함께 반역함에 의하여 발생한 창조세계의 파괴의 현상이며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우리와 나의 죄와 불순종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이건 자연적이건 악과 고통은 연대하여 공동악(common evil)을 추구한 인간성과 이를 내재화한 나의 내면의 죄에 의해서 발생하였고 등장한 사건들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다. 저자들은 이 질문을 “도대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악의 근원은 무엇이며, 나와 우리는 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악의 근원은 인간성의 신에 대한 반역이며 이러한 인간성을 내재하고 있는 나의 내면이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이웃과 자연세계가 고통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나는 죄와 지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함을 강하게 권고한다.
“신은 인간을 위하여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라는 유앙겔리온은 나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며 이로 인해 이웃과 세계가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나와 우리도 얼마나 더러워지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악과 고통은 인류의 공동악에 참여하고 있는 나의 전적인 타락과 죄악의 결과라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은 기독교로 입문하기 위한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성서의 저자들은 그런 설명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이해가능한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구속사라는 역사의 완성을 바라볼 때 수용가능한 유일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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