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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을 향한 공동체의 회복

세월호 참사에서 느끼는 당혹감, 수치스러움을 다시 생각해본다. 숨막히는 경쟁의 장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하며 나만을 중심으로 살아온 나의 삶과 우리의 삶 전체가 이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승객을 버리고 뛰쳐나온 선장과 승무원, 온갖 편법과 불법을 묵인해준 공무원들과 제도, 권한과 책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제도화된 무능의 전형인 전문가들의 모습에 나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중첩되고 이것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죄책감과 정서적 동요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실 이런 감정은 20여년 전 삼풍백화점붕괴사건이나 성수대교붕괴사건 때 느꼈던 분노와 원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일부의 부도덕한 기업인, 부패한 관료를 왜 국가가 제대로 색출하여 제거하지 못하였는가라는 질책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번의 느낌은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고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여온 우리의 삶이 낳은 참혹한 결과가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희생이였기에 느끼는 당혹감과 죄책감인 것 같다.

그 동안 우리들은 급속하게 진행되어온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타인의 삶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은 갈등과 경쟁의 관계로 상정되었고 협력과 연대의 가치는 무시되었으며 이런 구조 하에서 원자화된 나는 나의 생존과 이를 위한 자의 자원의 보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왔고 또한 자주 그것이 옳은 것인양 자기를 합리화해왔다. 우리들은 나의 생존을 위한 방어책으로 자주 주어진 임무를 방기하고 승객을 버리고 뛰쳐나왔고, 편법과 불법적인 제도를 묵인했으며 전문가연하였으나 그에 걸맞는 깊이 있는 지식을 쌓기 보다는 보상과 명성을 좇아왔으며, 그 와중에 타인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고 그저 경쟁해야 할 대상이나 이용해야할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된 결과는 착하고 순수했던 아이들의 희생이었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사회의 여러 부분의 개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재난 안전분야의 정책과 행정조직의 개편, 예산 및 인력 확충, 부패근절 등등 모두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타인의 삶과 고통을 외면했던 우리의 삶과 이를 조장했던 구조와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므로.

보다 근본적으로 고통받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에 대해 응답하는 나 자신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사회를 회복해야 한다. 상상력을 가진 인간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타인에게 감정이입하며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타인을 만나 진정으로 그와 소통할 수 있을 때 그들을 이해할 수 있고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하지 말라는 보편적인 도덕율에 응답하는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타인의 삶과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관계의 기본이 되는 정치공동체와 사회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공동체 구조 속에서만이 사회구성원들은 타인의 삶과 고통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지속할 수 있으며 더 큰 연대와 공감으로 자아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효율이라는 가치로 인해 해체되었던 타인의 삶을 향한 공동체를 회복한다면 우리의 죄책감은 조금이나마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지울 수 없는 수치심으로 우리의 삶에 남겨질 것이다

가치부재 또는 가치과잉

‘정의가 무엇인가’가 읽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가치(value)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원래 가치를 다루어야 할 집단, 제도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치부재의 사회가 되어버렸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가치는 경제적 가치이다. 이외의 모든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종속되어 버렸다. 정치적 가치 거의 논의되지 않고, 종교적 가치 기독교뿐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기관은 대놓고 경제적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정당, 정치단체, 학교, 종교단체 어디에서도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돈이라는 가치만을 말하고 추구하고 있으니 사회가 가치부재의 사회, 돈이라는 가치과잉의 사회로 몰락하고 말았다.

 

한국 정치체제에 대한 Functional Definition

CONTENDING CONCEPTIONS
OF SCIENCE AND POLITICS
Methodology and the Constitution of the Political
MARY HAWKESWORTH
My

Politics를 정의하는 이론을 크게 구분하면 Institutional definition of politics, Politics as a struggle for power, Pluralist conception of politics, Functionalist definition of politics로 구분할 수 있다고 (Yanow ed. Interpretation And Method 2장) 할 때, 스스로를 ‘정치평론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사회체제, 정치체제를 정의할 때 지나치게 Institutional, Pluralist definition에 매몰되어 있는 것같다. Function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 변수를 생략하면서 설명과 예측에 많은 실수를 하고 있다. 정당이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한,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체인가? 내가 보기엔 한국에서 정당은 전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개인들의, 어떤 집단의 이익에 종사하는 기능에 정치이념은 상징적인 수준의 동원에 불과하다. Function을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국의 정치 현상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 민주주의의 환경

김갑수, 아리송한 최장집 화법 뭘 말하자는 것인가

대다수 한국 시민들이 요구하는 가치를 크게 나누면 정치적인 가치와 경제적인 가치로 구분할 수 있겠고, 정치적 가치는 정치과정 참여를 보장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와 Liberal democracy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에 다른 의미가 부여되어서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다고 본다)의 가치에 대한 요구로 구분할 수 있겠고, 경제적인 가치는 경제적인 부라는 측면과 공정한 경제구조에 대한 요구, 경제적인 불평등이라는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같다.

내가 생각할 때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자생적으로 발전되어온 사회에서는 정치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같은 방향으로 요구되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가치가 경제적 부의 축적을 주도하는 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 부의 증진을 위해 민주주의는 필요불가결의 조건이고, liberal democracy의 가치들은 그 민주주의를 성립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consensus가 존재한다. 그에 비해 한국같이 민주주의가 외래적으로 이식된 사회에서는 정치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반드시 동일한 방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주의체제에서 부의 증진을 역사적으로 경험하였고, 민주주의는 권위주의국가가 제공한 부의 증진에 따라 추가적으로 부여된 사치재이다. 이런 상황에서 Liberal democracy의 가치,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내용를 정당화하고 그것의 확산을 주도할 계급은 없다. 그것은 경제적 부, 정치적 참여와 분리될 수 있는 추가적인 소비재인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참여 이상의 시민의 권리에 대해 강한 요구를 갖고 있지 않다. 이점이 Semi-democracy, Flawed democracy의 특징 중에 한국에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본다.

어떻게 변화를 도출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호남의 정권교체는 가능해도 현재한국의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엘리트의 내부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정운찬이 이명박과 손을 잡는 모습은 한국 엘리트 네트워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정운찬은 노무현이 대통령자리 넘겨준다고 해도 안 갔을 것이다), 중도 좌파 정당이 권위주의 세력과 대결해서 이기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다. 변화를 집적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입만 나불대는 것은 참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모양인데, 다른 사람 의견에 말꼬리 붙잡는 시간에 자기성찰하기 바란다.

법치주의

‘법치’라는 용어에는 rule of law와 rule by law라는 두 가지 다른 개념이 모두 포섭된다는 측면에서 모호성이 있다. rule by law는 흔히 독재자의 법을 통한 지배를 뜻한다. 용어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rule of law는 ‘법의 지배’, rule by law는 ‘법에 통한 지배’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또 다른 방법은 rule by law에 한국 대통령 이름을 담아서 ‘M-식 법치주의’라고 번역하고, 이것을 정치학 용어 사전에 돈주고 올리고, GW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하나 더 받는 방법도 있다. GW은 창피한 줄 알기 바란다.

한국 민주주의의 단계 2

한국의 정치 발전 political development의 정도는 어떻게 될까? 한국의 정치 현실이 민주주의에 어느 정도 가까울까? 보통 논문에서는 Polity IV 데이타 베이스와 Freedom House Index를 사용하는데, 새로운 데이타 베이스가 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서 발표되었다. methodology가 검토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앞의 두 가지도 사실 methodology차원에서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으므로 깊이 연구할 것이 아닌 참고만 한다고 할 때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Polity IV 민주주의 지수 8점! 보통 민주주의 지수 – 권위주의 지수 이렇게 점수를 내는데, 한국은 8-0이니까 8이다. 밑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은 다른 측면에 비해 행정부 수반의 권력통제가 약하다. Freedom House Index 한국 3점 이건 낮을수록 좋은 거, 2점이 만점이고 14점이 최하점수이다. 투표 등 정치 참여에 자유는 최고점이지만, 사회경제적 자유는 약간 낮은 편. 2점인 나라와 비교하면 의미가 파악된다. EIU Democracy Index 2006, EIU Democracy Index 2008은 변동폭과 현실이 잘 반영되는 것같다. 이에 따르면 한국 2006에 7.88로 결함있는 민주주의였고 2008 8.01 겨우 민주주의 대열에 들어섰다.

세 가지 지수의 차이가 뭘 말하냐면, 민주주의를 가장 기초적인 형식에 초점을 맞추면 (Polity IV) 한국은 민주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허들을 잘 넘어선다. 그러나, 내용을 잘 보면, 가까이가서 그것을 검토할수록, 그 점수는 낮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FH index, EIU index) 결론적으로 민주주의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잘 살펴볼 때 한국은 민주주의와 결함있는 민주주의 (Flawed Democracy) 또는 반민주주의 (Semi-Democracy)의 경계선 상에 서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과 권위주의를 원하는 세력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민주주의로 성숙해갈지, 권위주의로 퇴행할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쪽의 힘이 더 센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단계

민주주의를 다양하게 유형화할 수 있겠는데, 그중 non-democracy에서 안정화된 민주주의라는 축에 정치체제들을 놓고 분류해보면, 대강 Non-democracy, Pseudodemocracy, Electoral democracy, Polyarchy, Liberal Democracy, Radical Democracy이렇게 볼 수 있겠다.

Non-democracy와 Pseudodemocracy는 선거의 존재여부이다. 선거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만 본다. Pseudodemocracy와 electoral democracy는 선거가 경쟁적 competitive해야한다는 것인데, 쉐보르스키는 1) ex ante uncertainty, 2) ex post irreversibility, and 3) repeatability를 말했다. 선거의 결과가 사전적으로 불확실하고, 사후적으로 번복불가능하며, 규칙적으로 선거가 열릴 때, 이 선거를 경쟁적이라고 본다. 이런 조건이 성립된 정치체제부터 민주주의로 분류한다. Polyarchy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선거가 ‘보통’선거일 것, 그리고 선거 간, 평시의 정치활동이 경쟁적 선거를 담보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여 freedom to speak and publish dissenting views, freedom to form and join organisations, and alternative sources of information 등이 확보될 것을 요구한다. O’Donell같은 사람은 여기에 선출된 정치인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한다고 하여, 군부나 경찰의 권력통제가 되었을 때를 상정한다. 마지막으로 Liberal democracy, 선출된 정치인들간의 상호견제, 특히 행정수반에 대한 헌법에 근거한 견제 constitutionalism, 법치주의 legality, the rule of law, the deliberative process, 정치적 다원주의 political and civic pluralism, 개인과 집단의 자유의 보장, 그래서 계속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이 대표되는 경우 영미식 자유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좀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 이런 조건 하에 규범적인 가치를 추가하여 social, participatory, gendered, discursive, deliberative democracy 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한국은? Polyarchy로 성숙되는 과정에서 electoral democracy로 격하되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민주주의 자체가 유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일을 저지른 집단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냉전주의가 아니라 개신교이다. 한기총 기독교라고도 부를 수 있다. 집단의 제도도 있지만, 이념적으로 이들을 해체시켜야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다.

p.s. 누가 너무 심한 말 아니냐고 하던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348 여기서 “유 목사는 당시 칼럼을 통해 “설득을 하든, 여론을 조작하든, 극단적인 충격 요법 쓰든, 대통령은 국민들을 자신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파시스트들이 개신교의 의사결정을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