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이세돌의 인공지능과의 승리는 아마 인류의 마지막 승리가 될 거라는 이야기, 인공지능이 인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의 결과일거라는 이야기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대국을 보면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원천은 아래와 같다.

첫째, 이제 인공지능을 소유한 사람들과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간격이 생겼다. 이제까지 육체노동에 한정되었던 소유에 따른 지배가 정신노동에까지 확대되어 소유와 지배에 따른 권력관계가 이전단계와 질적으로 다른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정신노동에서는 아직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계급간의 이동이 이제는 불가능해지는 단계가 된 것이다.

둘째, 인간이 협업을 통해 생산해온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까지 바둑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에서 1차적인 단순화된 기초지식이 있고 이를 전세대가 전수해주고 후세대는 이를 무조건적으로 습득하고 점차 복잡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추가하는 방식의 집단지성의 지식생산방식이 유지되어왔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 인지적인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 이번 대국이 보여주듯 이런 형태의 지식이 기실 상당히 불완전하고 짜임새가 부족한 못한 지식체계임이 드러났다. 기본이라고 하는 몇 가지 규칙에서 벗어나는 수가 보다 효율적이고 우수한 해임이 드러났다. 이로써 바둑의 지식생산방식에 결함이 있음이 나타났고, 유사한 방식의 지식생산방식을 취하고 있는 인류의 모든 분야에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는 어떻게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지식공동체에 던져졌다.

셋째, 자료의 처리의 단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기계와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자료, 정보의 처리와 관련된 대부분의 일, 일자리는 인간에게 돌아오지 않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사회의 발전과 부의 창출의 방향임이 분명하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데이터 투입 이전 단계, 데이터가 없는 단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떤 데이터 아키텍트가 타당한가,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여 가공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설계에 한정된다. 이것도 기본적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단순화된 설계에서는 경쟁력이 없고 상상력의 개입이 많이 필요한 고도의 추상적인 단계에서만 그렇다. 이와 관련된 능력이 충분히 개발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는 극대화될 것이다.

개인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고도의 창의력과 상상력에 관한 역량을 키울 것인가, 지식공동체 차원에서 어떻게 지식생산의 알고리즘의 재구조화를 이룰 것인가, 구조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계급간의 갈등과 충돌을 제도권 내에서 해결할 것인가.

늑대아이

10/10

이 놀라운 이야기는 신화와 미시사를 절묘하게 배열하고 엮어서 다층적이고도 다원적인 의미를 구성하였다. 이야기의 전개와 에피소드, 상징적인 사건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마스터피스를 만들었다.

이야기의 주제이자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흐름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어머니 “하나” 일대기이다. 순진하고 연약한 여대생이 그 모진 과정을 거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두 아이들을 키워내고 결국 각자의 인생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노애락은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아들 아메가 결국 자신의 소명을 위해 떠나야 할 때 “난 아직 너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라는 하나의 말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의 소명을 받아 떠나는 아들을 보내는 성모의 거룩한 희생이 모든 어머니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숲속에 있는 곰과 곰새끼들의 모습들에서 보이듯 모든 생명의 어미니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웃을 수 없는 억압에서 벗어나 드디어 웃음을 되찾는 모습의 변화, 꿈 속의 코스모스가 드디어 만개하는 모습, 뭉개구름이 점점 커져가는 모습 속에 “하나”가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도시에서 공동체적인 삶이 있는 농촌으로 이주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일본사람들의 세계관이기도 하고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동시에 유키와 아메의 성장의 이야기가 신화적 원형으로 함께 전개된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이자 이질성을 감추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기로 한 인간과, 신성을 쫓아 어머니를 떠나기로 결정한 영웅의 이야기가 신화적인 구성으로 제시된다. 여기에도 많은 상징과 의미가 있지만 많은 내용들은 결국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엄마가 만들어준 원피스 너무 예쁘다.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태어나고 크고 유치원가고 국민학교 가고 하는 모습,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는 보면 애들 생각이 나서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아기자기한 농촌에서의 삶도 진짜 저렇다면 도시의 삶은 당장 정리해도 될 것같다. 아이들을 결국 세상에 보내야 한다는  부모의 숙명에 순응하는 것도 자연의 순리와 합일되는 인간상이겠다. 다만, 나는 사냥감 잡아서 먹을 것 갖다주는 역할이나 잘 해야 하는 사냥개에 불과하다.

좀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보면 기실 이 이야기는 엄마가 딸에게 전해주고 딸이 이것을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고 – 또는 자신들을 버리고 -, 자신의 운명을 찾아 나간 아들을 떠나보낸 엄마와 누나가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상상력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자신들의 내면의 감정과 무의식이 투사되고 전이되어 형성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싱글맘으로서 살아온 그 모든 어려움을,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는 딸과 함께 이야기를 통해 극복하고 살아갈 힘을 얻어낸 이야기이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슈헤이의 이야기 속에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존재하는 전형을 조금 더 비틀었다면 어떤 의미가 구성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원령공주처럼 딸인 유키가 소극적이고 약한 모습에서 자신의 운명을 쫓아 산으로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Forrest Gump

6/10

netflix 덕분에 예전 영화를 쉽게 틀어놓을 수 있다. Forrest Gump는 미시사와 거시사의 흐름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면에서 이야기의 혁신성이 있다. 보통 미시사에 거시구조를 조건으로 제시하거나 거시사에 개인들의 삶을 작은 구성요소로 배치하는 수준에 머무는데 비해 이 영화는 두 가지 흐름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에피소드로 중첩시켜 융합시킨 독특한 시도이다. 이 점에서 상당한 의의와 독창성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Gump와 Jenny의 대비, 그리고 그 대조 속에 제시되는 다양한 형태의 상징, 그리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정치적 보수주의에 대한 옹호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거슬린다. Gump는 사실 트럼프이고, 트럼프를 지탱하는 것은 검프의 이미지이다. 이는 아브라함 링컨의 자랑스러운 정당을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세기적인 약체 후보인 힐러리에게도 깨지는 정치적 자살의 기원이다.

명분, 이익, 호감

정치판인 학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되기 위해서 명분, 이익, 호감이라는 3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부회장이나 임원으로 상당기간 봉사했다는 명분, 이제까지 어디서 주로 했으니 이번에는 어디서 해야 한다는 명분, 어떤 전공이 해야 한다는 명분 등의 명분. 거기에 이해가 반드시 결부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회장이 되었을 때 나에게 무슨 이익이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뭔가 콩고물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어떻게 재원을 마련하여 어떻게 회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가, 그런 역량이 있는가 하는 물질적 측면이 있다. 여기에 개인적인 친밀감, 호감, 연대감이 있어야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호감이 있어야만 명분과 이익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명분이라는 게 아마 정치이고 이해라는 것이 경제라면 호감이라는 것이 심리로 그것의 주된 요소는 정신분석의 주된 개념인 투사일 것이다.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투사는 성숙한 인격이자 의존성에 대한 포용일 것이다. 새해에는 어떻게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공부를 하려고 한다.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동굴 속의 맹인

개인주의적 질서와 공동체주의적 질서 중 어떤 질서를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에 관한 공식적 비공식적 규범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고 질문하면 둘 중 하나가 맞고 틀리다기 보다는 둘 중 하나가 낫고 못하다라는 판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어떤 것이 더 낫다라는 판단은 한 두가지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추상적인 지식은 정보의 네트워크이자 총합으로써 단면적인 것이 아닌 복잡한 체계의 성격을 띄고 개별적이지 않고 종합적인 특성을 갖는다. 단면으로, 개별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전체의 특성이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로 기능하고 개별적인 것들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규율한다.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추상적인 지식에 근거한 설명이 타당성이 없는 많은 반례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그 지식을 수정하여 보다 넓은 이론적 범위를 찾도록 할 이유는 될 지언정 그 지식을 바로 버릴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다른 지식에 비하여 더 낫다면 그 지식은 얼마든지 유용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경험적 사례가 맞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은 하나의 기준, 하나의 사례로 환원되지 않는다.

페이스북이 세상인 줄 알고 나대는 녀석들의 특징을 보면 지엽적인 사례나 단순한 기준으로 복잡하고 추상적인 지식을 기각시키려고 하는 논리를 가진 놈들이 많다. 그리고 그게 자기 머리속에서는 성공적으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이유를 힘과 권력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멋도 모르는 놈들이 자기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동굴 속에 맹인인 것이다. 가장 한심한 인간상이라고 하겠다.

조직화와 제도화

정치레짐으로서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polity에 사회와 경제의 필요에 대하여 일정한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고 이에 기초하여 어젠더를 발굴하고 생산하며 적절한 국가정책을 개발하고 집행하는 정치과정에 협력하는 네트워크 및 조직간 지원체계가 제도화된 다수의 집단이 구성이 되어있어야 한다. 주요 정치적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다수의 언론기관, 사회운동단체, 정당, 협력적인 관료엘리트집단 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상승작용을 이루는 네트워크이자 집단이 최소한 2개 이상,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보다 충분히 많이 존재해야 이들이 선거과정을 통하여 정치영역에서 경쟁하고 보다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이념에 충실한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가만히 보면 이런 집단이 하나밖에 없고, 야당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가치나 어젠더생산이나 시민과의 접점이나 정책집행관료나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하여 명색있고 실제로는 무질서하고 무능력하다는 특징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당의 일사분란함은 60년대 공화당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제도화되었다고 본다. 조직문화라든지 정당의 구조, 기능이 관료제적 질서하에 형성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권력으로 진화되어 사회의 제도들을 흡수하면서 공고화된 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나 한다. 반면 야권의 무질서는 레짐이 유지되기 위한 권위가 카리스마있는 지도력에 근거하였는데 제도화되지 못하고 체계화되지 못한데 이유가 있지 않나 한다.

경험이나 친밀성이 아닌 가치와 이념에 대한 공유와 이를 바탕으로 한 조직화과 제도화가 되야지 뭐라도 되지 안 그러면 별 영양가없는 사교클럽에 머물게 될 것이다. 우리교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