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터키에 강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은 비극을 보면서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비극과 불합리를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무질서와 비통한 슬픔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흔히 이웃들의 슬픔과 고통을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출하고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자 하는 선한 양심의 호소를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 인류애와 형제애 또는 자매애를 통하여 자연이 야기한 불행에 대해서 인간이 공유하는 공동선(common good)으로 극복하고자 한 미담에 대해 뿌듯함과 위로를 얻고자 하며 이러한 취지의 이야기에 의존하여 삶의 희망을 찾고자 한다.

이 생각의 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선하고 전능한 신과 피조세계, 신의 선한 질서에서 벗어난 무질서와 혼란과 파탄과 고통, 이러한 파괴와 비극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러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다. 우리들의 양심을 대표하는 몇몇 사람들의 선한 행동과 공동선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으로 불행 속에서 작은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 안도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신성일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위로를 주는 스토리이자 신의 뜻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인간들의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흐름은 몇 가지 면에서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괴리가 있다. 먼저 이러한 이야기와 질문에는 우리와 분리된 어떤 집단이 있고 이들에 대하여 동정심과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 전에 그들과 우리라는 분리가 전제되어 있다. 둘째, 이러한 이야기 속의 화자와 독자는 자연적인 무질서와 비극과 신의 성품과 의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한다. 선이라는 신의 성품과 절대적인 신의 능력과 파괴적인 무질서와 비극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조화가 될 수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춘다. 셋째, 자연의 무질서와 무관한 제3자이인 “우리”들은 인간애와 인류애를 가진 양식이 있는 인간으로서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도움의 손을 내미는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선한 존재로 상정한다. 넷째, 우리와 신은 신이 우리에 내재(immanence)하고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와 동일화된 존재로서 관계맺는 상황을 상정한다. 피조물인 우리에 남겨진 신의 흔적 외에 초월적인(transcendent) 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기독교적 관점은 이러한 설명과 비슷하면서도 관점과 강조점이 사뭇 다르다. 첫째, 모든 인류와 피조물은 창조세계의 질서에서 하나로 묶여진 공동체이다. 저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연대성 속에서 하나의 가족이고 이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피조세계의 파괴는 곧 우리와 나의 부서짐이다. 인류와 피조세계의 연대성과 통일성을 깨뜨린 분리와 분열은 그 자체가 근본적인 타락의 결과이다. 이를 전제로 한 수혜와 시혜의 관계는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던 간에 근본적으로 창조세계의 원형으로부터 벗어난 파괴와 타락의 결과를 내포한다.
둘째, 성서는 선하고 세계를 다스리는 신과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모순에 머물러있는 관심을 우리와 신의 관계와 우리와 죄악의 세계의 관계로 바꿀 것을 촉구하고 있다. 비극과 부조리와 악의 원천과 결과에 대해서 나와 우리와 신과의 관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와 우리와 이러한 악의 결과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셋째, 자연과 세계의 무질서와 고통과 악과 우리들은 어떤 관계인가. 성서는 우리들은 신 앞에서 연대하여 공동악(common evil)을 저지르고 추구해온 타락한 존재임을 지적한다.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자극을 통해 카타르시스와 안도감을 느끼는 우리의 이기심은 인류의 공동의 신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으로 인한 죄의 결과이다. 이러한 죄의 결과 우리는 인간사의 다양한 도덕적 악(moral evil)의 결과를 낳고 스스로 또는 서로 고통받고 있으며, 자연세계의 무질서인 자연적인 악(natural evil)을 경험한다. 공동선이라는 옅은 신의 흔적 이전에 근본적으로 연대성에 기반한 공동악(common evil)을 추구하는 인류와 그 공동체에 포함되어 적극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인간이 바로 나이며 인간의 실체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넷째, 성서는 선한 창조와 피조세계의 파괴와 붕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있는 화자와 독자를 비극적이고 악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의 직접적인 관련자로 부른다. 세상의 죄와 악과 고통에서 벗어나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그 고통과 비극의 현장에 내재하는 가해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자연의 무질서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악과 고통은 인류가 신에 대하여 함께 반역함에 의하여 발생한 창조세계의 파괴의 현상이며 이러한 결과의 원인은 우리와 나의 죄와 불순종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이건 자연적이건 악과 고통은 연대하여 공동악(common evil)을 추구한 인간성과 이를 내재화한 나의 내면의 죄에 의해서 발생하였고 등장한 사건들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다. 저자들은 이 질문을 “도대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악의 근원은 무엇이며, 나와 우리는 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악의 근원은 인간성의 신에 대한 반역이며 이러한 인간성을 내재하고 있는 나의 내면이고 이로 인하여 수많은 이웃과 자연세계가 고통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상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나는 죄와 지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함을 강하게 권고한다.
“신은 인간을 위하여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라는 유앙겔리온은 나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며 이로 인해 이웃과 세계가 얼마나 심각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나와 우리도 얼마나 더러워지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악과 고통은 인류의 공동악에 참여하고 있는 나의 전적인 타락과 죄악의 결과라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은 기독교로 입문하기 위한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설명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성서의 저자들은 그런 설명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이해가능한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구속사라는 역사의 완성을 바라볼 때 수용가능한 유일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이다.

스테인 글라스

모든 기독교는 보편기독교가 아니고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기독교든 자신을 보편적인 기독교로 자리매김한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모든 기독교의 내재적인 갱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보편교회로 자칭하는 종파는 역사적으로 보편교회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 국가종교로 전환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독교는 국가종교로서 기여과 과오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고 특히 파시스트정권과 반유대주의에 적극 관여한 국가기독교의 과오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한편 우리가 접하는 모든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모자이크이자 스테인드 글라스의 한 조각이라고 하다면 우리는 한 부분의 아름다움과 함께 전체 그림을 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독특하면서도 예쁜 한 조각의 빛과 멀리서 등장하는 조화와 균형의 이미지를 모두 보아야 한다. 조각은 조각으로서 보아야 하고 전체는 조각에서 벗어나서 전체로서 봐야 한다. 조각을 전체로 봐서는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한 조각에 대하여 깊이 음미하려고 노력하되 기왕이면 전체에서 빠져있는 조각에 관심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에게 외래적인 세계관으로서 기독교라고 한다면 더 다양하고 특이한 한 조각에 관심을 갖는게 좋지 않나 싶다. 나는 웨슬리언 홀리니스 띠올로지가 기독교의 이념형에 가장 충실하다고 보기 때문에 이쪽으로 계속 가겠지만, 기독교에 입교한다고 한다면 중요한 전통이자 유산이나 한국에 널리 퍼지지 않은 종파의 전통에 기대면 좋을 것 같다. 성공회, 정교회, 루터란교회를 비롯하여 에티오피아교회, 콥틱교회, 퀘이커, 메노나이트 등 다양한 전통이 있으니 이를 통하여 입교하는 것도 좋을 것같다.

교과서의 노예

행정교 성직자로서 다음 주 설교준비를 하면서 주석으로 이거 저거 찾아보고 있는데 펜들튼법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식적인 해석에 따르면 미국의 혼란스럽고 부패한 정치와 행정을 개혁하기 위한 행정개혁의 시발점으로 역량있고 능력있는 공무원선발을 위한 법제도로서 미국행정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매관매직이 일상화된 정치적 임용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시험에 바탕을 둔 베버리안 관료제로 개혁한 작업으로 개혁과 혁신의 이미지가 부여되어 있다.

이번에 Straussman의 주석서를 보니 이게 사실은 1870년대 아일랜드를 비롯한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이 들어오고 이들이 투표권을 획득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정부를 장악해가는데 대하여 기존의 WASP들이 반동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만들어낸 제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표에서 밀리니까 고위공직자 자리는 뺏길 수 없다라는 의도로 교육 등의 자격을 내걸었고 겉으로 합리적 제도개혁으로 보이게 포장한 것이라는 것이다. 펜들턴이 상원의원인데 반동적인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니 앞뒤가 딱 맞는다.

사실 Wilson의 정부의 연구라는 문헌도 행정교의 창세기에 해당하지만 이게 사실 당시에는 임팩트 없었고 행정교를 독립시키면서 사도들이 경전으로 발굴해서 제시한 것이다. 그냥 우리 밑에 있으라는 정치학자들에게 뭔 소리야 우리는 창시자가 너그들이 존경하는 미국 대통령이야, 우리는 족보가 남다른 학문이야라고 사실 만들어낸 전통이자 신화인 것이다.

역시 교과서의 역사는 믿으면 안 된다. 의심하고 질문해야 진실에 가까와 질 수 있다. 지금 친일이니 반일이니 하는 초딩수준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다들 만들어진 교과서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좀 멀리 떨어져서 이해관계없는 제3국의 입장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300년 후의 역사가의 입장에서 구한말의 역사를 봐야지, 친일공정, 반일공정으로 만들어진 교과서의 신화에 얽매이면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脫亞入歐

대한민국은 脫亞入歐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같은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국제관계에서 문명권 간의 충돌이라는 현상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시하면 안된다.

중국몽의 근간이 동아시아 중화 조공체제이라는 세계관이자 문명에 대하여 분명히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 새로운 문명권으로의 편입과 독자적 하위문명권의 구축이라는 두 가지 방향의 그랜드 국가전략이 요구된다.

일본이 탈아를 고민할 때 시간적으로 전근대적인 역사와의 단절을 통한 근대화와 공간적으로 청일, 로일전쟁을 통한 독자적인 영향력 공간의 확보를 경험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도 중화문명권의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로부터 분명히 차별화하고 조공체제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국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반민주주의, 단지 독재가 아니라는 수준의 정치체제에서 자유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제반 가치관과 사회제도를 공격적으로 분쇄하고 demo에 의한 국가권력의 완전한 복속이 구현된 민주정치체제를 확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 물리력, 경제력의 극대화를 통하여 체제를 위협하는 외부세력에 대해 압도적인 위협을 상시 유지해야한다는 것도 시사한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이자 허상에서 벗어나 문명이라는 현상의 공동체이자 실체로 국가의 방향을 전환하여야 한다. 민중에 의한 통치와 시장에 의한 경제와 공동체에 의한 자율이 확립된 새로운 문명권으로 향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총서

우리집에 대대손손 지켜야할 훈요10조를 만들었는데 그중 제2조는 “책값과 부조금은 절대 아까워하지 마라”이다. 제2조에 대한 시행령으로 “아파트는 못사더라도 세계적인 출판사들의 전집은 웬만하면 장만하라”와 “경사는 부조금만 보내도 되나 애사는 꼭 방문하여 애도하라”이다.

책이라는 게 생각날 때 뻗어서 손 닿는 곳에 있어야 볼 수 있는 것이지 그 때서야 인터넷 찾고 파일 뒤지고 하면 벌써 마음이 흐트러진다. 그리고 인류의 지식창고에 해당하는 세계적인 출판사의 총서 “very short introduction series”, 이와나미 문고, 프랑스의 갈리마드시리즈(우리나라 번역본은 시공디스커비러총서)이런 것들은 쉽게 관심갖기 어려운 주제들도 접근할 수 있게 주제와 설명을 잘 하고 있다. 독서에 있어 편식을 하면 잘못되기 때문에 인류의 중요한 지식에서 빠뜨리지 않고 접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총서류가 긴요하다.

이런 책들 성경책 읽듯이 손에 들고 읽는 것이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르네상스적 마인드를 함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총서의 다양한 주제를 쭉 훑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복잡한 세상을 어느 정도 복잡한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이런 총서를 돈 좀 들여서 세트로 구비해놓고 심심할 때 하나씩 꺼내 읽어가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야말고 교육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번에 시공디스커버리총서 장만에 이어, 이번에는 아쉬운 점이 많긴 하지만 노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총서시리즈인 살림지식총서 1-100 셋트를 아그들의 교보재라는 명분으로 질렀다. 사실은 내가 갖고 싶어서. 이거 이제 600번째 책 바라보는데 전권 사도 이백이면 된다. 앞으로 천천히 전권 마련해보려고 한다.

아메리칸대학과 대한민국

얼마 전에 다른 회사 부장님들과 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부장님들이 또 라떼는 어땠다는 둥 라떼 시전하는데, 속으론 짜증나지만 웃으면서 그냥 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데 러떼는 어땠냐고 화살을 돌리는 거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라고 대답해줄까 하다가 그랬다가는 심기경호에 실패할 거 같아서 그냥 내가 이런 저런 경로로 단편적으로 들었던 아메리칸대학와 관련된 얘기 몇 가지 해주고 때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분들이 분명히 다른데 가서 또 라떼 시전하면서 내가 해준 얘기갖고 또 이빨 깔게 뻔한데 이게 부정확한 얘기가 되면 내가 가짜뉴스 퍼트린 게 되는 거다. 그래서 팩트체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학교와 대한민국의 관계도 좀 정리하고. 빅마우스들도 이런 면에서 쓸모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리를 해보면 1893년 허스트감독이 주도하여 설립허가를 의회로부터 받았다. 웨슬리가 미국에 애즈베리 감독 등 파송한게 1765년 경이니 감리교가 미국에 자리잡은지 한 백 년이 되어 대학원 중심의 종합대학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이 당시의 진보주의 사회개혁운동 progressive social movement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약 20년간 재정적으로 준비하면서 건물과 학교시설, 교수진을 구성하였고, 1914년 드디어 대학원생들을 입학허가하였는데 이때 28명 19명이 중 5명이 여성, 1915년 처음으로 흑인학생을 박사과정에 허입하였다. 과거 흑인들이 가끔 흑인대학 아닌 대학에 입학허가한 예는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AU는 미국 대학 중에 공식적인 입학기준으로 차별금지정책을 채택한 최초의 대학이다.

개교식에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참석하여 대학의 방향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해주었고, 뉴딜 추진하면서 대학원 시내에 개설할 때 루즈벨트 참석하고 이게 School of Public Affairs로 발전하였고, 쿠반 크라이시스 때 잔 에프 케네디 왔서 중요한 대외정책 발표했었고, 오바마대통령도 한번씩 와서 연방정부의 중요한 정책에 대한 선언을 했었다.

대한민국과는 이승만대통령이 39년에 하와이에서 디씨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는데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반도에 대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 중에 한 인물이라 외교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폴 더글라스라는 정치인이 전담마크 했었다. 이 분이 아메리칸대학에 총장으로 오면서 1943년 4월 8일 임시정부 설립을 기념하여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허스트홀 옆에 제주 왕벚나무 4그루를 심고 코리안가든으로 지정하여 주었다. 벚나무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고 한국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왕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때 상황을 American Eagle이라는 신문이 보도했다고 인터넷에 나오던데, American Eagle은 우리나라로 치면 교내 언론인 학보이지 신문이 아니다. 이게 11년쯤에 SIS건물도 신축하면서 대대적으로 확장공사하여서 현재의 코리안가든이 되었다. 내가 듣기로 노무현 대통령도 스미소니언박물관에 한국전시관하고 이 코리안가든 조성에 상당액의 기금 출연하도록 했다고 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방문하여서 명예박사학위 수여하였고 강당에서 연설도 하였다. 그 영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https://www.c-span.org/video/?52469-1/events-south-korea

이 대학이 졸업생이 적어서 한국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워싱턴디씨에 파견된 공무원이나 지상사 직원들은 다 아는게 외교가인 매쓰애버뉴 끝에 자리잡고 있고 대사관 관저가 바로 붙어 있어서 송년회나 관저행사할 때 한번 가보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학교의 특징이라면 역시 감리교 미션스쿨이라는 점, 바로 옆에 Wesleyan Theological Seminary가 붙어 있고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인인 잔 웨슬리의 동상이 서있다. 감리교 4대 기둥이 성서, 전통, 성령, 이성이다보니 신학교와 대학이 같이 붙어 있다는 것은 진보적 사회개혁이라는 이상을 잘 표현하는 것같다.

미션스쿨이지만 정신적인 차원에 있어 자기탐구에 있어서도 기독교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캠퍼스 한 가운데에 있는 Spiritual Center에서 다양한 예술활동과 공연, 종교활동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윌슨 대통령류의 progressive movement의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가치를 내재화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고 그 중에 중요한 가치 하나가 sustainability이고 이를 캠퍼스 공간에 구현하였다. 캠퍼스 전체를 arboretum으로 구조화하였고 국제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서 캠퍼스 공간이 수목원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이거 earth day, beutification week 이런 행사하면서 신경 많이 쓰는데 모르면 그냥 넘어가지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굉장히 다양하고 색다른 수목들 잘 관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이 대학은 여러가지 면에서 역사적으로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의 구현을 위한 교육기관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양성, 포용, 이성, 자율 이런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학교에 졸업생들은 실비만 내면 한 과목 청강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데, 나중에 은퇴한 다음에 근처에 살면서 청강하고, public lecture 듣고, 도서관에서 책 빌려읽고, Katzen Art Center에서 전시회 보면서 살면 좋을 것같다.

https://www.american.edu/about/history.cfm 학교 홈페이지에 나온 교사

https://auomeka.wrlc.org/exhibits/show/american-university-history 학교도서관에서 만든 교사

알아서

지난 번 회사에 들어가서 한참 바닥을 기고 팀장이 되어서 하루는 원장님 보고를 하러 들어가니 나니 원장님이 원래 조직에 들어오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해야 하지만 자네는 일 잘하고 다들 좋아하니 너무 조용히 하자는 대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견 표명해도 돼라고 하더라. 내가 속으로는 자기 싫어하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내가 요구하는 것에 200% 일을 해주니 나를 자기 측근으로 생각하고 날 좋아한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시더라. 이분이 다양한 면에서, 특히 돈문제가 많은 분인데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란 말은 정말 공감할 수 있었고 그래도 아무나 CEO가 되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 회사에 들어와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철칙으로 식사 시간에 똑똑하고 아느칸에서 커피 나르면서 최대한 로키로 지냈다. 우리 부서는 프로그램 허입 면접을 볼 때 팀원 전원 참석해서 압박면접을 보는데 어떤 고객님 면접을 하는데 진행이 좀 원활하게 안 되자 당시 과장이던 금과장님이 “이대리는 뭐 질문없어요”라고 하신다. 순간적으로 뇌속에 있는 구글번역기에 버금가는 한국어번역기를 돌려보니 “야 라떼 부장님들은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하시고, 날도 더운데 과장인 내가 이거 다 해야겠어. 뭐 물어봐야하나 생각하는 것도 짜증난다, 신참이 알아서 좀 해봐”라고 나온다. 오케이, 바로 모드 전환하여 지원동기는 뭐고, 계획은 뭐고,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이건 어떻게 된거고 악역 막하면서 아주 줄줄 시간 잘 때워드렸다. 끝나고 나니 부장님들, 과장님 다들 잘 보고 잘 쉬었다는 만족한, 흐믓한 표정들.

이제 내가 과장이 되어서 어제 부서 프로포절 발표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두어 번 했었는데, 신경을 안 썼더니 라떼부장님들은 라떼는 부장님들 이런 거 안했어, 대리들은 70년대 생들이 MZ들 흉내내서 내일 아니니 난 모른다 이래 가지고 행사가 많이 위축되었었다. 이래 가지곤 고객님들 사용자 경험에 만족도 낮게 나올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과장인 내가 적극적으로 닥달하였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아니 이런 걸 알아서 못하나. 지들이 MZ세대야 꼭 말을 해줘야 하게.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과장이 이러고 있는데 대리들이 눈치가 없어!” 나도 라떼 과장 다 되었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미세하면서도 빠른 조율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되도 않는 얘기 들어주고, 들은 거 못 들은 척해주고, 본 거 못 본 척해주고, 말할 거 참고 말 안 해야 한다. 그러나 저기서는 입 뻥끗하는 것도 피곤한 사람들 대신해서 생각해주고 말해주고, 거칠게 압박하는 악역도 해줘야 한다. 그것도 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조직생활이라는게 엄청나게 피곤한 것이다. 월급만 아니면 내돈내산 작은 책방이나 내서 책이나 보면서 유유자적 자족하는 삶을 살면 좋을텐데, 목구멍이 검찰청이라, 쓰끼다시같은 내 인생은 어쩔 수없이 다시 회사로. 누가 이런 나를 “알아서” 챙겨 줄 사람 없을까.

취미

고객님들이 종료미티에서 내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봐서 영화보고 영화평 쓰는 거라고 대충 얼버무렸는데, 사실 내 진짜 취미는 언어 갖고 놀리라고 할 수 있다. 외국어 배우기를 넘어서서 다양한 언어 간에 비교하고 조합하고 범주화하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것이 내 취미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영어 하나만 해도 이게 하나의 문명이기 때문에 그안에 무궁무진하게 살펴볼 만한 소재들과 이를 다루고 있는 책과 자료들이 널려있다. 가장 최근에 살펴본 것은 신조어(neologism)과 관련된 사전들이다. The Oxford Dictionary of New Words인데 1990년부터 10년 단위로 2010년대까지 새롭게 등장한 주요 단어와 표현들을 쭉 나열하고 있다. 나는 이런 걸 보면 너무 부럽다. 한국어는 말만 과학적이고 세계적인 문자다 국뽕이나 빨지 한국어에 사회적인 노력과 헌신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한국어도 중요한 장난감 중의 하나인데 한글의 표기방식에서 가장 불만인 사항은 모아쓰기, 띄어쓰기, 소리나는데로 쓰지 않고 원형을 표현하는 형태주의 이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독특한 표기법이 한글의 표음성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표기법에서 몇 가지를 고쳐서 내 나름의 표기법을 개발하고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제일 용이해보이는 띄어쓰기를 붙여쓰기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두번째로는 당연히 에스퍼란토어를 배워서 현재 영어를 사용하는 수준 이상의 단계까지 사용법을 익히고 이를 활용하여 글들을 발표하는 일이 되겠다.

세번째로는 유럽인도어족의 국제공용어인 에스퍼란토어와 유사하게 동아시아 한자어권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국제어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공통 개념사전이 요구된다. 아직 일본어를 못배웠는데 중급수준까지 빨리 도달하여 4개국어 공통 개념어 사전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이를 바탕으로 표기법을 개발하여 4개국어를 사용하는 언중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국제공통어를 만들어보는게 꿈이다.

이런 쓸 데없는, 돈 안되는 일을 하면서 언어를 갖고 노는게 내 취미라고 할 수 있다.

붙여쓰기 예

시편1편 (공동번역)

복되어라. 악꾸미는자리가지아니하죄인들의길거닐지아니하조소하는자들어울리지아니하,

야훼께서주신법으로밤낮으로그법되새기는사람.

에게안될일무엇이!냇가심어진나무같아서그잎사귀시들지아니하제철따라열매맺으리.

사악한자그렇지아니하바람까불리는겨와도.

야훼께서심판하실때머리조차들지못하, 죄인이의인들모임끼지못하리라.

악한자멸망이르,의인야훼께서보살피신다.

한글의 특징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한글이 매우 매우 독특한 문자체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한글이 표음문자인데 음절단위로 모아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음운인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하나의 음절이 되는데 이를 한 글자로 만들어서 쓰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한자를 모방한 결과이므로 대단한 창조적이고 파격적인 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의 독립된 소리인 음절에 독립된 표식이 대응되므로 소통에 있어서 정확성과 효율성이 크다는 장점이 있다. 한 소리가 한 글자로 표현되니 정확성이 높고, 적은 분량의 글자로 소리를 표현할 수 있으니 효율적이다. 표음문자 중에 모아쓰기를 통해 음절이 하나의 글자로 표현되는 문자체계는 없는 것 같다. 트위터를 보면 150자 한도가 있는데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므로 사실 50자 한도로 설정해야 하는데 이런 식의 예외가 없는 것을 보면 문자 중에 한글과 같은 사례는 없는 것 같다. 둘째, 한글은 매우 독특하게 띄어쓰기가 표준적인 문법체계를 가지고 있다. 의미가 적은 문법적인 기능만 수행하는 어휘는 의미가 분명한 어휘에 붙여쓰고 이들 간에는 띄어써서 분리되고 독립적인 의미단위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런 어법체계를 갖고 있는 문자는 없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한자라는 표어문자를 사용하여 비슷한 어원을 활용하고 있는 동아시아 4국에서도 띄어쓰기는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띄어쓰기가 남한에서 가장 확립되어 있고 북한이나 조선족 어법에서는 약화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 띄어쓰기 자체자 40년대 도입되어 확산되어 온 어법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결정적인 변화는 국한문혼용체에서 한글전용체로 바뀌면서 소리글자의 나열에서 의미단위를 분명히 보일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띄어쓰기의 효용성과 필요성이 분명해지고 남한에 완전히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중국어의 경우 문법적 기능을 하는 허사라고 하는 단어는 언중이 이미 알고 있고 이 앞에 나온 글자는 의미단위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분리하여 공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일본어의 경우도 문법적 기능은 가나, 의미는 한자로 주로 표현되니 자연스레 의미단위가 분리되어 표현되니 다시 띄어쓰기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베트남어는 전부 표음문자들이 띄어쓰기로 나열되는데 어디가 의미이고 어디가 문법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베트남어도 한글처럼 한 단어와 조사까지는 붙여쓰고 나머지는 띄어쓰는 띄어쓰기를 도입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뭔 희한한 소리냐고 쳐다보던 눈빛이 기억난다. 셋째, 한자를 어원으로 사용하고 한자를 활용하여 새로운 개념에 한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만들면서 이를 붙여쓴다. 예를 들어 인권이면 권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독자적인 의미로 인식되고, 다른 한자와 조합되면서 원형이 바뀌지 않으면서 하나의 개념으로 붙여서 씌여져 하나의 단어로 표현된다. 영어로는 human rights인데 두 단어 사이의 의미적으로 연결되나 표현이 안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rights이라고 잘 씌이지 않고 civil rights면 civil rights, human rights면 human rights 이런 식으로 개념화되고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개념화나 재개념화가 훨씬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같은데 이는 한자의 장점이니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우리나라에 국한문혼용체에서 한글전용체로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확 바뀐게 94, 95년인데,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가 내가 궁금한 점이다. 표기방식은 표준화된 문자사용법으로 일종의 제도에 해당한다. 하나의 제도가 전격적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제도를 둘러싼 제반 환경과 보완제도들의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건 국가에 의하여 표음문자화가 강제화된 베트남이나 북한의 경우와 다른 자생적인 질서의 변화라 그런 식의 조건이 작동하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는 표음문자가 효율성이 클텐데 왜 이런 식의 표음문자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나, 한국어와 중국어의 이중언어사용자인 조선족들, 한국어와 일본어의 이중언어사용자인 재일교포들은 한국어를 표현할 때 한글전용, 국한문혼용, 병용 중 어떤 식으로 문자생활하는지, 그 방식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 이런 점들이 궁금하다.

그리고 한자어로 표현되는 개념이 한자의 조합과 붙여쓰기라는 방식으로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인권, 시민권, 기본권 이런 개념들이 나열되면 어떤 권리라는 공통된 개념의 변용으로 개념들 간의 공통점이 권이라는 독자적인 한자어로 하나의 범주로 포괄되어 인식되는 것같다. 영어에서는 human right와 civil rights 이렇게 표현되면 뚜렷하게 대립된 개념으로 의미적으로 상호 배제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human rights는 시민/국민이 갖는 권리 빼고 인간으로 인정되는 권리라는 의미로 인식된다. 인권과 민권 이렇게 놓으면 인권은 선거권 등 모든 시민으로 갖는 권리를 포함한 넓고 포괄적인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연상하게 된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단어 조합방식과 붙여쓰기라는 문법체계에서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아베 사망으로 일본 신문 살펴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