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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피어시, 완전한 진리, 사회계약론에 대한 설명

존경하는 별아저씨가 낸시 피어시의 Total Truth의 자연과학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열심히 비평하고 있으니, 덩달아 정치철학에 대한 매우 부족한 설명(주로 p.701-707, 기타 산재)에 대해서 간단히 논평:

첫째, 낸시 피어시는 이론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가정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해야 하는 명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론을 도출하는데, 설명과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명제를 도출하는데 전제가 되는 공리적인 명제이다.

둘째,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방법론적 전체주의 논쟁, 환원주의 이론체계 reductionism에 대해 무지하여 사회계약론의 결론으로서의 사회질서 발생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가정에서 집합적 가치가 도출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배제한다.

셋째, 정치이론의 사회경제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독립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조건, 사회계약론이 제시될 때 어떤 사회질서에 대한 반동이 있었는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자연과학에 비해 사회과학의 이론의 발전을 규정하는 사회과학의 이론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methodological individualism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책 몇 권만 봐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사회계약적인 관점은 정치학의 근본가정으로 그 이전의 이론체계, 신을 근거로 했던 이론체계의 파라다임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근본가정에 근거한 이론체계가 충분히 제시되기 까지는 유지될 것이고, 현재 그렇게 될 전망은 적다. 별다른 말도 없이 중세적인 세계관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은 책에서 말하듯 부흥사들이나 할 말인 것이다.

톰 라이트, Surpised by Hope

톰 라이트의 Surpised by Hope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와 역사적 바울 연구, 바울신학에 대한 새로운 시각 New perspective로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신약성서가 형성되는 시기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신약성서를 이해할 때 좀더 진실에 가까운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그런 시각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적 발전을 재검토하였다. 이런 접근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신약의 의미를 더욱 깊게, 더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

이번에 본 Surprise by Hope은 새로운 접근이 제시해주는 톰 라이트의 하나님의 나라, 부활, 교회의 미션에 대한 설명이자,  신약성서의 전체에 대한 의미에 대한 설명이다. 전통적인 입장의 기독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지만, 좀더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둔 신학적인 논증으로 설득력이 더해진 설명을 제시한다.

Part 2의 6장부터 11장은 저자의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설명이고, Part 3의 12장부터 15장은 결론이자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함의에 대한 설명이다. 기존의 기독교 변증에 비해 새로운 시각으로 제시한 기독교에 대한 설명은 역사적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이원론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논증하고 있고, 교회의 역할도 기존의 이원론적인 태도와 활동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미션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개인주의적 구원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교회에 대해서 거시적인 전창조질서 차원의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전인류적인 교회의 미션을 제시한다.

삶의 현장에서의 예배, 신앙의 요체로서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역사적인, 신학적인 연구로서 그 근거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책인 것같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더 깊이 알수록,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인으로, 통합적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해주며, 목회적으로 방향을 지도해주는 좋은 책으로 ‘내가 뽑은 성숙한 신앙을 위한 필독서’ 반열에 올려놓는다.

Atonement Theory

존 스토트의 Why I Am A Christian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1. Christ died to atone for our sins, 2. Christ died to reveal the character of God, 3. Christ died to conquer the power of evil 간결하면서 명징하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첫번째는 Atonement theory, 두번째는 Moral-Influence theory, 세번째는 Christus Victor theory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 이슈에 대해서 내 개인적인 생각은 Atonement theory와 Moral-Influence theory, Atonement theory와 Christus Victor theory는 상충되지 않고 상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Atonement theory에서 주장되는 크게 다른 두 가지의 주장 Substitution theory와 Government theory는 상충적, incompatible하다. 하나의 주장이 다른 주장을 배제한다.

이런 생각이 맞다면, 기독교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의 주장에 대해서 조사하고 여기서 어떤 주장이 좀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학습인 것이다.

나는 Government theory가 더 성서와 내적인 정합성internal consistency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이 입장이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기독교에 가깝다고 본다. Substitution theory는 좀더 상대적인 역사적인 정황에 의존하는 면이 강하다고 본다.

Scripture, Tradition, Reason, Experience

노상 ‘말씀과 기도’, ‘말씀과 기도’라는 분들께 그게 아니고 ‘말씀’, ‘교회의 전통’, ‘이성’, ‘기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넓은 세계를 만나라고 말하고 싶다.

Wesleyan Quadrilateral

* Scripture – the Holy Bible (Old and New Testaments)

* Tradition – the two millenni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 Reason – rational thinking and sensible interpretation

* Experience – a Christian’s personal and communal journey in Christ

나의 교회관 2

나의 교회관 1

‘나의 교회관’은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규범에 관한 견해라기 보다는 내가 교회를 선택한다면 이런 교회를 선택하겠다는 개인적인 기준의 의미가 가깝겠다.

첫째, 설교 또는 강론의 내용이 성서의 메세지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결과인가가 중요한 기준이되겠다. 괜히 농담이나 하고 잘 알지도 못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의견, 특히 정치적인 의견을 공동체적인 메세지로 격상시키려하는 경우는 기본적인 기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되겠다. 연관된 문제는 교회의 정치구조인데, 교회 내부에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일인의 권력이 과도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 굉장히 중요하다. 권력이 과도하면 남용될 수밖에 없고 제대로된 갈등해결구조가 없으면 조그만한 문제에도 개판이 되기 십상인 게 종교집단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권한범위를 넘어선 발언을 설교중 하지 않도록 견제하는 장치, 공동체 내에 의견차이가 발생할 때 무난하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구조가 꼭 있어야 한다고 본다. 즉, 나는 가장 기본적인 threshold 기준으로 성서적인 메세지와 권력남용을 방지하는 교회정치구조를 꼽는다.

둘째, 공동체가 얼마나 성서의 메세지에 진지한가를 보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먼저 여성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여성이 설교를 할 수 있고, 목회자가 될 수 있어야 하며 중요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를 볼 것이다. 여성을 동원하더라도 생색내기이거나 가장 중요한 교회의 대표자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점에서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은 가톨릭교회에 참여할 생각은 없다.

셋째, 또 다른 사회적인 약자요 소수자인 동성연애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겠다. 백찬홍은 gay issue에 대한 기사에서 “가톨릭에서는 동성연애를 죄로 여긴다. [중략] 개신교내에서 동성애를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신은 오직 이성애만을 인정한다 동성애의 감정과 행동을 가진 사람들을 죄악시할 필요는 없지만 동성애자들은 질병과 결점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왼손잡이로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색맹으로 태어나듯이 신의 창조적 표현이 동성애자로 태어나게도 한다 동성애자들은 창조의 은혜와 선함의 일부로서 동성애는 창조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들을 풍성하고 신실하게 만든다.”고 정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굉장히 큰 문제는 ‘어떤 견해를 갖는가’의 문제보다 사회적인 약자인 소수자를 악, 외부자,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의 일체감을 고양시키는 조직관리방식이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이혼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 대놓고 비난한다거나 직책을 박탈한다거나 도덕적으로 비난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혼이 분명하게 죄라고 성서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인간의 경제적인 탐욕, 공공의 수많은 문제들, 사회적인, humanitarian issues에 비해서 그 중요성이 굉장히 덜한 gay issue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교회들 많고, 미국에 특히 많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공통의 적을 만들어 집단의 일체감을 높이는 전체주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구성원에게 도덕적인 우월감을 심어주어 조직에 충성도를 높이려는 전술의 하나이다. 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나는 United Methodist Church의 구성원이고 우리교회 문제점도 많고 깝치는 철 안든 녀석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갈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성공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바로 한국에 떨어진다면,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가나안 교회에 출석하게 될 지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처럼 되지 않으려면

오마이, 팔레스타인 몰아내야 예수님 오신다?

뉴조, 팻 로버트슨 목사, 팔레스타인 점령은 신의 뜻

전세계의 양심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을 비난하는 가운데, 이런 멍멍이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정신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탈로 등장하고 있으니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오마이의 설명에서,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세대주의와 Christian Zionism은 다른 것이겠지만, 세대주의자 대부분은 Christian Zionism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겠다. 그리고 이 듣보잡 세대주의라고 하는 신앙체계(체계라고 말하기 어려운)에 대해 간단하게 잘 정리한 세대주의 이런 문서가 인터넷 상에 있다. (원문은 찾을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해 이런 관점은 역사적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체계와 모순되며, 자신들의 주장이 내적으로 모순된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른 신의 구원의 계획이 있다는 주장.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This view bifurcates between Jews and Gentiles, maintaining that God still has different redemption scenarios for the two groups. Its adherents do not understand that the Church is the new and true Israel. Instead, they view the Church as an interim scheme of God, devised only after Israel rejected Christ as its Messiah. It expects another Temple to be built when the millennium begins, with sacrifices for sin again offered in it and the Old Testament priesthood reinstituted. (Grider, A Wesleyan Holiness Theology, p.532)” 둘째, 예수님이 임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고 그것의 성장이 보편적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역사의 종말은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한다. 그와 함께 보편적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를 통한 통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셋째, 기독교의 교주 예수는 구약성서는 자신을 증거하는 문서이며 자신의 시각에서 전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분리주의, 선민의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러므로 세대주의가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체계의 최종표준인 교주의 인식과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인데, 이것은 모순된 두 주장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듣보잡이 횡횅하는 것일까?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이런 되도 않는 얘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지적수준을 보여주는 양태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신학이 없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개신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칼빈의 영향으로 Covenant의 관점이 대다수의 개신교교회를 지배하고 있고, 가톨릭의 보편교회론이 가톨릭 교회에서 공식적인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듣보잡 세대주의가 근래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개념없는 교회들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운동을 한다느니 하면서 코메디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교회들이 온누리, 지구촌 이런 교회라는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얼마전 한국의 대형교회의 구조를 비교하면서 강북대형교회와 강남대형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였다. 카리스마틱한 한 종교지도자에 의해서 커진 1인집중체제가 강북대형교회라면, 평신도 제자훈련이라는 이름하에 다양한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센터식의 체제가 강남대형교회이다. 편의성과 기복성이라는 전통은 변함이 없지만 내가 보기에 굉장히 중요한 점은 ‘신학의 강조’에서 ‘감정의 강조’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회는 최소한 신조, 신학을 내세웠고, 기복신앙적 설교를 하긴 했으나 최소한 정치,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다수의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긴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조직성장이라는 최우선 과제 아래, 신학, 성례 다 필요없고, 가장 쉬운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노래 몇 곡 부르고, 이미 중산층이 된 사람들에게 더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을 설교하고 있다. 교회 다니면 느는 것은 노래실력이고,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이지, 기독교의 신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논리적 체계는 어떤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한국 개신교회가 계속 유지되면 한국에서도 저런 듣보잡 세대주의가 힘을 얻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국 개신교회, 이미 사회악이지만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한국교회가 최소한 미국교회처럼 되지 않으려면 빠른 시일 안에 자신들의 핵심가치 core value, 핵심적인 신조와 신앙체계를 강조하는 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 신학이 공동체를 인도하고 신조가 개인의 삶을 지도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문화센터에서 학교로, concert hall에서 lecture hall로, 사교 클럽에서 communion으로 바뀌어야 그렇게할 수 있다. 안 그럴거면 클럽 프렌즈로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해체해라. 그게 한국 사회에 기여하는 최소한의 방법이다.

개인, 제도, 이념

프레시안, ‘한국진보’가 오바마에게 배워야 할 것

정치 시스템의 보편적인 구성요소가 있다면 최종적인 의사결정자로서 구성원, 구성원들간의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제도, 구조, 그리고 최종적인 지향점으로서의 이념이 있을 것같다. 최장집교수의 ‘한국 정당체제의 취약성으로 인해 저성장한 민주주의’란 진단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처방으로 제시하고 있는 미국 민주당 벤치마킹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정당정치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같다. 역시 이념정립을 위한 토론과 그 이념을 뒷받침하는 의사결정자를 스크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한국 사회의 여러가지 부문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이념, 가치와 제도가 없고 다만 인적 지배 personality rule만 있는 경우가 많다. 정당도 그렇고, 공직자들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다. 헌법과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나중에 갖다 붙인 것이고 돈이나 찾는 관료들, 권력을 최우선시하는 정치인들, 종교적 이념은 대충 갖다붙이고 조직동원에나 관심갖는 종교인들, 기업조직이 가족의 이익을 위한 수단인 재벌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회에서 정치발전이라고 한다면 더 구체화된 정치이념을 담보하는 정치적 제도를 가진 정당이 세워지고 개인의 불확실할 지배에서 정당의 제도화된 지배 안에서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겠고, 경제부문에서 발전이라고 한다면 기업의 지배구조가 합리화되어 지분에 소수가 기업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경제적 능력에 맞는 의사결정자들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구조로 바뀌는 것이 되겠고, 종교부문에서 발전이라고 한다면 성직자의 불안정적인 1인 의사결정에서 벗어나 종교적 가치를 내면화한 교회구조 안에서 구성원들이 교회공동체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형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반토막과 가톨릭의 성장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가 종교적 가치를 대중들이 기대하는 만큼 내면화하지 못하고, 그 가치를 구현하는 의사결정 구조를 대중이 기대하는 만큼 합리화시키지 못하면 한국의 대표종교는 가톨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종교문화의 ‘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