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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험은 개도국의 교과서

한국의 경험은 개도국의 교과서
칠레 가톨릭 대학 한국경제론 강의를 마치고
필자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지원하는 한국학 객원교수 파견 사업에 참여하여 2009년 10월에서 11월까지 칠레 가톨릭대학 아시아 학과에서 ‘한국경제발전과 행정의 역할(Understanding Economic Development And Role Of Government InKorea)’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하였고, 11월 12일 같은 대학에서 열린 중남미한국학세미나에서 ‘신자유주의와 한국발전국가의 새로운 역할(Neoliberalism AndThe New Missions Of Korean Developmental Stat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좋은 와인의 나라로 알려진 나라, 한편 중남미의 ABC(Argentina, Brazil,Chile의 약자, 남미의 강국을 의미) 중 가장 좋은 사회발전을 이루고 있는 나라 칠레에서 잠시나마 머물면서 느꼈던 점을 나누고자 한다.한국의 과거는 칠레의 미래여덞번의 강의는 (1) 한국경제발전의 역사와 현재(The History Of EconomicAnd Social Development Of Korean Economic System) (2) 한국발전국가의 역할(The Role Of Korean Developmental State) (3) 재벌과 기업가(Chaebol, The Korean Conglomerate) (4) IMF 금융위기와 한국경제체제의변화(IMF Crisis And Beyond)라는 네 개의 주제로 이루어졌다. 한국경제체제의변화와 발전을 통시적으로 살펴볼 뿐 아니라 현재 중요한 구조적인 요인들 간의 역학관계를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다른 한편 경제체제를 이해하는 방법의 틀을 제시하고한국에 적용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다른 어떤 나라의 경제체제를 분석대상으로 하더라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연구의 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수강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수강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학생들은 아시아학과 전공자들이었는데, 그동안 일본의국제교류재단(Japan Foundation)이나 중국의 공자학당의 재정적 지원으로 두 나라에 대한 강의가 많았던 반면, 한국의 경우 경제발전이나 민주화에 대한 강의가 없었다. 처음으로 이런 강의가 개설되어 다들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것 같았다.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주제는 역시 한국경제발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부의 정책의 공과 과였으며, 한국정부의 정책들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적용가능한가 하는 문제였다. 칠레는 한국과 유사한 역사적 궤도를 거쳐 현재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였고, 2010년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이 되기 위한 국민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한국이 1996년에 비슷한 국민소득 수준에서 OECD를 가입하였음을 생각할 때 칠레의 현재는 한국의 15년 전이라고생각할 수도 있겠다. OECD 가입과 동시에 본격화된 자본시장 자유화 정책의 실패로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아 국민적고통을 겪었고, 또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빠른 시일안에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완결 짓고 부채를 상환한사실을 설명할 때, 행여 칠레에도 비슷한 경제위기가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개도국의 외환위기는 국제경제체제에서 구조적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질문하던 어떤 여학생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의 과거는 칠레의 미래이며 미래는 준비하는 자들의 것이라대답할 때 짓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도 기억에 남는다.한국의 발전과 행정의 역할교육상장(敎育相長)이라고 했던가. 수업을 준비하면서, 학생들의 질문과 토의를 통해 나 자신도 우리나라의 발전에 대해그동안 갖고 있었던 어렴풋이 갖고 있던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 같다. 한국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냐는질문, 국가를 떠올리던 생각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발전과정에서 공공행정, 공공정책이 시민사회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면서 구체화되었다. 한국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을위해 경제적 자원배분을 계획하고 배분했을 뿐 아니라 시장구조, 산업구조, 노동시장 구조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수립했다.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뿐 아니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도출할 수 있는 경제시스템(Economic System)을 설계하고 구축한 것이 경제발전 그 자체만큼 중요한 성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한국의 공공행정은 이런 사회, 경제 시스템을 뒷받침하는중요한 행위자이자 제도로서 다양한 형태의 정책을, 그리고그 정책들 간의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내었다. 예를 들어, 정부는 한국사회의 높은 교육열이라는 사회문화적 요인을 양질의 노동력 제공이라는 정책적 목표에 적절히 대응시키는교육, 노동정책을 통해 사회경제발전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의 교육수준은 점차 향상하였고 경제발전단계에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져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에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하이테크 사업으로 산업구조가 신속하고 유연하게 변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교육수준의 향상, 노동생산성의 제고, 경제산업구조의 발전이 선순환(virtuous circle)을 이루어 온 것이다. 이런 한국의 발전 모습은 발전을 저해하는 전근대적인 사회구조, 비효율적인 공공부문, 발전을 저해하는 정책실패, 사회경제적낙후를 반복하는 악순환(vicious circle)에 빠져 있는 대부분의 개도국의 모습과 대비된다.요약하면, 한국의 공공부문은 한편으로는 사회, 경제적발전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스템 안에서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달성할 수 있는 정책들의 조합을 생산해냄으로써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나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칠레로부터 배울 점들한편 잠시 살펴본 것이 다였지만, 칠레로부터 한국이 배울점도 적지 않았다.먼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관찰한 사회 시스템은매우 세계화, 선진화되어 있었고 안정되어 보였다. 대학의 행정도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예상하지 않은 변수는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 머무는 강사에게도 표준화된 규칙에 따라연구실, 개인용 컴퓨터 심지어 도서관증까지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른 일례로 대중교통인 지하철 시스템은 매우 잘 되어 있고 세계 지하철의 표준적인 형태를 갖춰 나처럼 스페인어는 ‘올라’ , ‘씨’ 밖에 모르는 사람도 전혀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칠레 사회 내에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보호도 돋보였다.칠레의 전 대통령은 싱글 맘인 바첼레트 대통령이다. 흔치않은 여성 국가원수인 그녀는 2006년 영아들에게 무료급식과 의료,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정책을 도입하였다. 칠레는또한 건국 이전부터 그 땅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에게도 다양한 복지혜택을 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계층에특별한 관심을 가진 정책을 통해 사회를 통합해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사회발전 모델로서 균형발전을 이룬 점도 유의해볼 만하다. 길게 늘어져 있는 국토라는 지리적인 요인이 균형발전을추구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수도인 산티아고와 가까운 도시 발파라이소도 경제적으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은 칠레 정부의 균형발전노력이 매우진지하였고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준다.한국행정학, 한국정책학의 세계화를 기대하며토요일 오후, 미국에서 20달러, 한국에서 4~5만원씩 하는,그러나 여기서는 단돈 3달러짜리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우와’하는 소리와 함께 온 시내가 난리법석이다. 오늘 칠레가 전통의 라이벌 에콰도르를 1-0으로꺾고 12년 만에 월드컵에 진출한 국민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시하는 월드컵 본선진출이 이 정도로 큰일인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너무 익숙하여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른 나라는 쉽게 달성하지 못한것이고 우리사회의 독특한 장점이며 개도국의 정책담당자들이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사실의 은유일지도 모르겠다.한국만 쳐다보고 있으면 한국에 대해서 잘 알기 어렵다는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한국의 경제성장이라는 것이어떤 것인지, 한국 사회의 구조는 어떤 것인지, 한국행정의성과와 실패는 어떤 것인지, 한국의 공공정책의 질과 우수성은 어떤지 등등.한국을 대상으로 한 행정학, 정책학이 한국의 공공행정에대해 세계를 오디언스로 생각하고 그 내용을 재구성할 때, 다른 한편 세계에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어떤 나라와 한국을 비교하는 관점에서 한국의 행정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그리고 그런 작업은 학문적 진보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 한국의 행정, 공공정책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소개하는 중요한일일 것이다. 이 작업은 새로운 세대, 우리 신진 행정학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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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 하나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세상의 악, 하나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된다면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 고난을 하나님은 허용하시는가? 세상의 수많은 악과 무질서, 그리고 세상 나라의 번창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용기를 가질 있을 것인가?

욥의 용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전제되어 있다. 심지어 사탄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욥은 하나님께 항의한다,그리고 하나님은 대답한다. 욥의 항의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다렸다가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에게 닥쳤던 일들에 대한설명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대답은 욥과의 관계에서 과거에 있었던 많은 일들, 그리고 과정에 형성되었던 믿음과 신뢰에 대해 지적하신다. 우주와 세상의 운행은 욥이 이해할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하나님은 욥에게 이해할 있는 사실들을 알려주시고 과거에 그에게 쌓인 믿음과 신뢰를 다시 되살아나게 하신다. 지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고통 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의 악과 악의 결과에 의한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신가. 세상에서 생기는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을 경험하실 예수님뿐 아니라 그와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계시던 성부 하나님도 죽음을 경험하신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성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악의 결과인 죽음을 스스로 감당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신,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어떤 고통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주는 용기 하나님 나라의 운행의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 우리는 없다. 우리들의 지적인 한계로 역사와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발전되어가는지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고 영적인 결단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관심이 있으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그런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고 승리를 향한 역사의 발전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하에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믿음으로 산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의 근원이자, 용기가 드러나는 태도이자, 세상을 향한 비젼이다. 평화의 예수를 경험한 사람들은 용기를 있고, 세상의 악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갈 있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대안으로 용기있게 초대할 있다. 예수의 평화의 삶이 약함과 고통의 삶으로 보이지만, 삶이 참삶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자신들이 믿는 삶의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예수님처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 사람의 가치를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해나가겠다는 강한 신념이자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있는 행동에 세상은 흔히 무시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 약한 자의 모습을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용기를 소유할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의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했고 그를 참된 주로 인정하셨다아울러 부활은 새창조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사망을 이긴 사건은 땅에서 그분의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사건이다. 예수는 부활할 모든 육체의 열매가 되신 것이며,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창조물임을 선언한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옳은 것임을 있고, 그분이 남기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있다. 동시에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의 삶에 믿음으로 동참할 있다. 이원론적인 태도를 넘어서 창조질서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용기를 가질 있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더디어 보일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 4:26-28) 천국운동의 시작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천국은 시작이 조용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있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겨자씨 알이 밭에 심겨졌다는 것은 이미 천국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적 성장과정을 거친 천국운동은 마침내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겨자씨가 자라나서 다른 나물보다 크게 되어서 공중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속성을 알려줄 아니라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있게 해준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예수님이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점차 발전하여 이땅에서 완성되어 간다. 종국적으로새 하늘과 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 완성될 하늘과 ’, ‘새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 거할 것을 믿을 있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있을 것이다.

약한 곳에 거하시는 (Tabernacling) 성령 마르바 던의 설명에 따르면 약함 속에서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시고 (dwelling/residing)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약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약한자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권력의 강함, 그리고 그들의 부정의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들의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약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용기를 가질 있다.

예수, 우리의 평화

예수, 우리의 평화

신약성경은 예수님과 관련된 다양한 평화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1) 누가복음 초반부의 평화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메시아임과 메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있다. (2)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술한 복음서는 평화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회심자에게 주는 구원과 평안로 설명한다. (3) 예수님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는 것을 강조한다. (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평화의 왕이라는 찬송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상징한다. (5) 예수님의 반복된 평화의 인사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한다.

신약성경저자들은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좀더 발전시킨다. 바울 사도의 말로 정리하면 (1) 평화는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얻는다. (요 16:33,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그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다. (2) 이 평화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롬 15:13, 살후 3:16) (3) 샬롬의 삶은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인 동시에 인류 공동체, 피조세계 전체와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골 1:15-20) (4)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길 때 바울 사도는 반복해서 평화의 하나님(God of Eirene)을 강조한다.

예수, 우리의 평화 (엡 2:14) 평화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화해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평화는 구약 시대에 약속된 ‘화평의 언약’의 성취이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평화의 실현이다. (사:54:10; 겔 37:26; 슥 9:9-10) 메시아는 거짓 샬롬 (false shalom)이 아닌 진정한 회복의 질서로서의 화해를 선포한다. (마 10:34; 눅12:51)

하나님과의 평화는 인간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사역이었다. (롬 5:10, 고후 5:19; 골 1:22) 인간의 상태는 약하고, 경건하지 않고 죄로 가득한 모습이었는데,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화해를 이루셨다. (롬 5:6-8)

이 평화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롬 15:13, 살후 3:16)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일 때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영생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영적인 축복들과 함께 신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평화를 깊이 누릴 수 있다. (롬 14:17; 빌 1:2; 갈 5:22; 갈 6:16; 롬 8:6)

회복된 창조질서에 대한 비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즉각적인 효과는 하나님과의 화해,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롬 5:1; 엡 2:14)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고후 5:17) 동시에 이 효과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구원의 사역이다. (고후 5:19; 롬 11:15) 샬롬의 삶은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인 동시에 인류 공동체, 피조세계 전체와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예수님은 평화 그 자체이며,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다. (엡 2:14-18; 골 1:15-20)  예수님은 그 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통일되는 우주적인 평화의 중재자이시다. (골 1:15-20) 본문을 통해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해의 사역이 우주적인 효력이 있음을, 에베소서에서는 인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장벽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로마가 가져다 준 세상의 평화에 대비된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차원의 평화를 보여준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평화의 복음 평화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와 공동체의 운영에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신약성서의 강조점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한 분을 통해 화해를 이룬 공동체이다. (Reconciled in one person)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 하나의 집이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조건에 얽매임없이 그리스도 한 분 삶, 죽음과 부활을 통해 받아들여지며 (엡 2:13-8),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길 때 평화의 하나님(God of Eirene)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이 주신 ‘평화의 약속’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매우 갈구하고 있다. 세상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평화가 교육, 계몽으로 올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전쟁, 힘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과연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샬롬 (Shalom), 에이레네 (eirene), 팍스 (Pax),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가 몇 가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쓰였다.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의 평화’는 어떤 것인가? 코스타 보이스는 기획기사를 통해 ‘예수의 평화’를 따르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지 고민해본다.

샬롬 (Shalom)

샬롬은 1차적인 의미로 외적인 만족과 내적인 만족 모두를 포괄하는 완전함, 하나됨, 조화, 번영, 건강함, 충만함(wholeness)이다. 전쟁에서 화해함, 전쟁에서 승리함 (return from war in shalom)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삼, 안녕, welfare, well-being의 의미이다.

한편 샬롬은 세상의 혼돈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blessing of peace)를 의미하기도 한다. (시편 29편) 샬롬은 관계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른 질서가 이루어질 때 달성된다.(창 1:26)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부각된다. 샬롬은 이스라엘 전체 사회를 이끄는 이념으로서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보는 미래의 회복된 질서라는 의미이다. (이사야 2:2-4, 미가 4:1-5) 종말론적 비젼(이사야 2:4)으로서의 샬롬은 종말에 야훼가 모든 나라의 심판자가 되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고 , 야훼가 다스리는 땅에는 모든 것이 완성되고 야훼의 다스림 안에서 이스라엘은 중심이 될 것이라는 비젼이다. 그러므로 샬롬은 미래 지향적 기다림이며 평화를 성취할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다. (사 2:2~4, 미 4:1~3)

구약의 샬롬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다는 아니다. 왜냐면, 구약의 샬롬은 다분히 힘에 의한, 폭력에 의한, 이스라엘의 부흥을 통한, 강압을 통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샬롬이 이스라엘의 복수와 신원, 이스라엘의 정복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이 목적은 될 수 있어도 수단은 될 수 없다.

예수의 샬롬 (Shalom, Eirene)

구약의 샬롬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제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를 전하고 이루시며 사셨다.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뿐 아니라 예언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평화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요약하는 여러 가지 개념 ‘하나님의 나라’ ‘희년’ ‘복음’ ‘기쁜 소식’ 이런 말 중에 중요한 한 가지 개념이 바로 ‘평화’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들이 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병, 그리고 그보다 근원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하시며 그 결과를 평안, 평화라고 말씀하신다. (눅 7:48-50;눅 8:48)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평화이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다시 정립되는 것,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이 이루어진 상태, 그것을 평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을 부탁하실 때도,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이 평화임을 말씀하신다. (눅 10:5-6) 그리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속지 말고 자신 안에서 구현되는 진정한 평화를 알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구약의 예레미아의 거짓된 평화에 대한 비난과 공명한다. (눅 12:51)

샬롬의 윤리

샬롬의 윤리에 관한 평화에 관한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다. (마 5:9)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적 비젼을 제시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윤리적 지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샬롬은 평화를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강국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인도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메시아가 강한 힘으로 그동안 당했던 고통, 한을 풀어주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전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때 화평케 함(peacemaking)의 의미가 구약의 샬롬의 의미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화가 목적으로서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으로, 수단으로서도, 그리고 목적으로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마 5:38-42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이런 점에서 특히 평화를 이뤄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평화의 태도를 유지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샬롬, 용기의 근거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약속, 평안할 것을 권면하신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구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상황, 현재 표면적으로 보이는 고통과 탄압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인들이 겪는 의문에 대한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점을 격려라고 한다. 예수가 누구인가, 실패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의 부활과 함께 진정한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의 승리가 고난의 현장 이곳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반복된 인사의 말씀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평화

예수의 평화

1. 평화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짧은 경구로 표현했습니다. http://www.quotationspage.com/subjects/peace/ 가보면 많은 명언들이 있는데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번 살펴보죠.

We shall find peace. We shall hear the angels, we shall see the sky sparkling with diamonds. Anton Chekhov (1860 – 1904), 1897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말하기도 하고요.

We make war that we may live in peace. Aristotle (384 BC – 322 BC), Nichomachean Ethics 평화를 위해서는 힘을 동원해야 한다 .

If man does find the solution for world peace it will be the most revolutionary reversal of his record we have ever known. George C. Marshall (1880 – 1959) 인류가 평화를 달성할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

Tao. Some of us look for the Way in opium and some in God, some of us in whiskey and some in love. It is all the same Way and it leads nowhither. W. Somerset Maugham (1874 – 1965), The Painted Veil, 1925 평화를 달성할 없을 것이다는 무력감.

Peace has never come from dropping bombs. Real peace comes from enlightenment and educating people to behave more in a divine manner. Carlos Santana, Associated Press interview, September 1, 2004 계몽과 교육에 희망을 거는 관점

First keep the peace within yourself, then you can also bring peace to others. Thomas a Kempis (1380 – 1471), 1420 마지막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이라고 있겠습니다.

글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매우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세상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엿볼 있는데요. 평화가 교육, 계몽으로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전쟁, 힘으로 달성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과연 평화를 달성할 있을 것인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감도 보입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예수의 평화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까?

2. 기독교의 전통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가 가지 있습니다. 샬롬 (Shalom), 에이레네 (eirene), 팍스 (Pax),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씌였습니다. 어거스틴이 팍스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고, 재세례파들이평화 공동체적인 신조의 기초를 두었습니다.

먼저 샬롬은 1차적인 의미로 완전함, 하나됨, 조화, 번영, 건강함, 충만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함 (return from war in shalom)이라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시편 29편에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blessing of peace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는 당시 다른 문화권에서 쓰이는 개념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 안녕, welfare, well-being이런 의미이겠습니다. (Hasting, Oxford Companion to Christian Thought) 이스라엘이 나갈 때는 이런 의미가 쓰였는데요, 이스라엘이 힘들 , 포로기 이후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생겨납니다. 샬롬이라는 의미가 안녕이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전체 사회를 이끄는 이념으로서 발전하고 종말론적 비젼을 의미하게 됩니다.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라보는 미래의 회복된 질서로서의 샬롬이 그것입니다. 이사야 2:2-4, 미가 4:1-5인데요. 어제 욥기의 욥의 이야기에 이스라엘의 포로기의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샬롬이라는 비젼의 발전과 욥의 이야기의 전개가 다른 방향의 신학적 발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사야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He will judge between the nations and will settle disputes for many peoples. They will beat their swords into plowshares and their spears into pruning hooks. Nation will not take up sword against nation, nor will they train for war anymore. (이사야 2:4)” 종말에는 이스라엘, 시온이 모든 인류역사의 중심이 것이며 야훼가 모든 나라의 심판자가 되어 세상에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다, 야훼가 다스리는 땅에는 이상 전쟁과 충돌이 없을 것이며 그때는 모든 것이 완성되고 야훼의 다스림 안에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에 중심이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젼입니다. 말씀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다는 아닙니다. 왜냐면, 구약의 샬롬은 다분히 힘에 의한, 폭력에 의한, 이스라엘의 부흥을 통한, 강압을 통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샬롬이 목적은 있어도 수단은 없습니다. 샬롬이 완성은 있어도 평화가 과정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분히 폭력지향적이고, 복수와 신원, 이스라엘의 정복이라는 의미가 있겠습니다.

3. 이런 구약의 샬롬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제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아니라 예언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유대교적 배경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복음을 제시하여주신 것이죠.

예수님이 평화를 말씀하신 구절은 매우 많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죠.

3.1. “평안히 가라

7:48-50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Luke 7:50 Jesus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사시더라 Luke 8:48 Then he said to her, “Daughter, your faith has healed you. Go in peace.”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에 관한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들이 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 그리고 그보다 근원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평안, 평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다시 정립되는 ,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이 이루어진 상태, 그것의 결과를 평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2. “평안할찌어다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Luke 10:5 “When you enter a house,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Luke 10:6 If a man of peace i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him; if not, it will return to you

칠십인의 제자를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대리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을 부탁하시는 장면인데요, 여기서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이 평화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요약하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희년’ ‘복음’ ‘기쁜 소식이런 말로 표현할 있겠죠. 중에 중요한 가지 개념이 바로평화입니다.

3.3. “화친을 청할찌니라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Luke 14:32 If he is not able, he will send a delegation while the other is still a long way off and will ask for terms of peace.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자격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Luke 12:51 Do you think I came to bring peace on earth? No, I tell you, but division.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대해서 도전하시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끌어내기 위한 예수님의 도전입니다.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속지 말고 자신 안에서 구현되는 진정한 평화를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구약의 예레미아의 거짓된 평화에 대한 비난과 공명하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평화를 자신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3.5. 마지막으로가장 중요한평화에 관한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5:9 화평케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Matthew 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야고보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James 3:18 Peacemakers who sow in peace raise a harvest of righteousness.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적 비젼을 제시합니다.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유대교의 경전 형식에 맞춰 편찬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는 하나의 덩어리로 있습니다. 요약하면 산상수훈의 말씀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강조할 있겠지만, 유대교의 가르침에 대비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윤리적 지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7:28-29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차이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약의 샬롬은 평화를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강국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인도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아가 강한 힘으로 그동안 당했던 고통, 한을 풀어주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9, 5:38-48 38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1:24; 24:20; 19:21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40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리를 가게 하거든 사람과 리를 동행하고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19:18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산상수훈 전체에서 의미를 찾아볼 화평케 하는 peacemaking 의미가 구약의 샬롬의 의미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있습니다. 평화가 목적으로서 아니라 자체가 과정으로, 수단으로서도, 그리고 목적으로서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5:38-42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이런 점에서 특히 평화를 이뤄나가는 과정, 자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평화의 태도를 유지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점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야 바인 같습니다.

3.6.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약속, 평안할 것을 권면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John 14:27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John 16:33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in me you may have peace.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구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상황에 대해 성경의 저자, 사도 요한의 의도가 엿보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재 표면적으로 보이는 고통과 탄압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초대교인들이 겪는 의문에 대한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있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점을 격려라고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실패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진정한 메시아이고 메시아의 승리가 고난의 현장 이곳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This verse reveals the dramatic situation of early Christians who recognized that final victory would come, as Jewish prophets and teachers said, when the Messiah comes in the future; but they also recognized that the Messiah had already come and therefore had inaugurated triumph in the midst of present tribulation.)

3.7. 부활후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4:36 말을 때에 예수께서 친히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Luke 24:36 While they were still talking about this, Jesus himself stood among them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부활후평안할찌어다

20:19 안식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John 20:19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 when the disciples were together, with the doors locked for fear of the Jews,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John 20:21 Again Jesus said, “Peace be with you! As the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느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John 20:26 A week later his disciples were in the house again, and Thomas was with them. Though the doors were locked, Jesus came and stood among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평화에 대한 인사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샬롬이라는 말이 당시의 보편화된 인사라는 측면이 있지만, 예수님의 반복된 인사의 말씀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신약성경저자들은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좀더 발전시킵니다. (1) 누가복음 초반부의 평화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메시아임과 메시아의 승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술한 복음서는 평화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회심자에게 주는 내적인 평안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영생과 유사한 의미를 갖습니다. (3) 예수님은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평화의 왕이라는 찬송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5) 교회 공동체가 분열이 생길 바울 사도는 반복해서 God of eirene 평화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로 정리하면 (1) 평화는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얻습니다. ( 16:33,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그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겼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2) 평화는 우리가 누릴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15:13, 살후 3:16) (3) 내적인 평화, 삶이 내면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있는 만족감인 동시에 공동체와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자신들의 이익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 1:15-20)

5. 성서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디어 신부님의 Living the Peace 소개하고 싶습니다. 디어는 성경의 평화의 의미를 가지로 표현합니다. The Depth of Peace: Inner Journey, The Height of Peace: The Public Journey, The Horizons of Peace

– The Depth of Peace: Inner Journey (Making peace with yourself, solitude, silence, listening, letting go, imagining God, intimate prayer, mindfulness), The Height of Peace: The Public Journey (the vision of peace, choosing peace, active nonviolence, public peacemaking, speaking Truth, live and let live, resisting evil, standing with the poor, witnessing for peace, disarming the world, Justice for all, including everyone), The Horizons of Peace (love your enemies, building community, forgive seventy times seven, persistent reconciliation, hope upon hope)

첫째, 먼저 우리들 안에 평화의 깊이를 다시 점검해봐야 하겠습니다. 로이드 존스,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Peace with God)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깊이 누리고 있는지 되돌아봐야하겠고,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평화를 소유하고 있는 우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디어 신부는 가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Making peace with yourself, solitude, silence, listening, letting go, imagining God, intimate prayer, mindfulness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깊은 평화를 막는 것들이 생길 , 일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찾는 일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심지어 종교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막는 일이라면 잠시 멈춰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 내용인데, 앎을 넘어 practice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신앙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The Horizons of Peace (love your enemies, building community, forgive seventy times seven, persistent reconciliation, hope upon hope) 지속적인 화해를 통한 공동체 형성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교제 fellowship이라고 하죠. 그런데, Fellowship 가장 중요한 전제는 다른 사람들을 Fellow 인정하는 것입니다. fellow라고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fellow 인정하고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중요성,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fellow 인정하지 않으려는 본성이 남아있죠. 우리와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에 먼저 눈이가고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지면싫고’, ‘멀리하고 싶고’, ‘공동체로 인정하기 싫은죄성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4:25-35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비웃어 이르되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우리가 화해하고 평화를 만들 대상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들, 우리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만 미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니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나누고, 화친을 나누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나가야 하겠습니다. The Height of Peace: The Public Journey (the vision of peace, choosing peace, active nonviolence, public peacemaking, speaking Truth, live and let live, resisting evil, standing with the poor, witnessing for peace, disarming the world, Justice for all, including everyone),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가 신앙적인 문제요, 신학적인 문제이라고 우리들 많이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모두가 우리의 신앙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고 공부를 하고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들 신앙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평화를 적용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것이죠. 모든 일이 하나님의 평화가 적용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시민으로서의 관련된 모든 일들,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작게는 가족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사회의 일원으로서, 문화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넓은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시각,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교정되어야 많은 일들을 우리의 관심사 안에 품고 각자 있는 범위에서 적극적으로 고쳐나가는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우리의 신앙의 문제로, 신앙고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이웃에 관한 비유.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제사장이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이와 같이 레위인도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2)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생각에는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에 따르면 평화를 살아가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은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작은 공동체, 특히 정치적, 종교적 공동체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씀이죠. 제사장, 레위인들 종교든 정치든 사회적 역할이 있는 사람들이죠. 역할에 충실한 물론 중요한 일이겠습니다. 정치적인 역할이든 종교적인 역할이든,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아마 뭔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그냥 지나쳤거나, 종교활동을 위해서, 혹시 설교를 하러, 성경공부를 하러 가던 중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들이 당장 앞에 있는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갖지 못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속해있던 공동체 밖의 사람들의 아픔을 모른척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당장의 이웃들의 필요, 갈등과 고통,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모른 척한다면, 그것에 대해 너무 바쁜 일상, 사회적 책임 때문에 고난받는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평화,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승리주의, 우리가 이겼다, 정복했다, 아니면 있다’, ‘긍정의 ’,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성공할 있다, 버티고 인내를 갖고 해나가면 학위받고, 결혼하고, 좋은 직장 구하고 그래서 그거 갖고 다른 사람들 도와줄 있다 이런 것은 아니죠.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이 갖고 있는 가르침, 예수님의 윤리적인 비젼, 하나님 나라의 평화의 비젼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평화를 평화 자체로 추구하고 과정에서 얻는 어려움은 잠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 부활과 부활을 믿는 교회를 통한 신앙의 삶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평화는 목적으로서, 결과로서만의 평화가 아니고 평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기독교의 요체입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만드는 일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인간적인 수단으로 해서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우리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존재하는 평화가 세상에 퍼질 평화가 이루어질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문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팔복: 값비싼 평화

랙스 채프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과 박해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 5:9-12)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정말 벅찬 일입니다.

집에 물러나 있는 ,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

친척들과 같이 지내는 ,

이런 일들은 좋고 편안하고 따뜻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

장벽이 있는 곳에서

제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

삶은 좋지도, 편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사랑해야 합니까?

제가 어쩌다가 한도 끝도 없이 사랑하셨던 그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던가요?

주님, 저를 강하게 하시어 죄책감과 두려움, 근심과 분노 사이를 중재하는 위험천만한 과제를 직면하게 하소서.

주님, 인생의 모든 문제와 아픔들을 기쁨과 환희로 받아들일 있을 만큼 저를 성장시키소서.

나중에 천국에서 뽐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진실한 인간,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평화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소서. 평화의 길에서 만나는 고난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과 승리를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코스타를 평화의 공동체로 이끌어주소서. 힘과 권력를 좇는 세상 가운데 평화와 희생, 이웃 사랑과 부활의 소망을 보여주는 공동체로 이끌어주소서.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올려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fe In Christ

예수가 유대교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종교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측면이 있지만,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기존의 유대교와 넘을 수 없는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예수를 미워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선택에 대해 근본적인 부정을 함으로써 선민의식에 기반한 민족주의에 정서적으로 동의하고 있던 민중들의 분노를 샀고,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의 율법적 지배를 비난함으로써 신의 대리자로 권력을 유지하던 기존 종교체제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교리적으로도 여러 가지 새로운 주장을 했는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Union with Christ라는 것이다. ‘내 안에 머물라, 그러면 나도 네 안에 머물겠다.’ 그리고 이 개념은 예수의 어록뿐 아니라, 신약 성서의 3대 저자인 요한과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러면 예수의 ‘Abide in me’와 그 개념을 발전시킨 바울의 ‘In Christ’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바클레이는 바울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개념을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Barclay 1966, pp.127-132) 첫째, in이 후기 헬라어에서 through, through the agency of라는 의미로 확장되어있음을 고려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통하여 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 슈바이처가 주장하듯 당시 신비주의 종교의 제의에서 종교적 환상 속에 어떤 신과 동일시하는 종교적 경험을 의미할 수 있다. 셋째, 어떤 이가 주장하듯, 문학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공기 안에 살 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비유일 수도 있다. 넷째, 바울이 비유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를 입음’, ‘그리스도가 안에 들어오심’,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 ‘세례를 통해서 죽고 삶’이 종합적으로 그리는 그림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롭게 된 경험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요즘 ‘그리스도 안’를 하나의 화두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그 ‘그리스도 안’은 그리스도가 있던 자리에, 그리스도가 마음을 둔 그곳에, 그리스도가 꿈꾸었던 비전에서, 그리스도가 나아간, 하나님 나라가 임한 그 곳에서 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런 바울의 경험을 세례를 통해서 경험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 안’을 경험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빈자와 병자, 창녀와 세리, 여자와 아이에 다가간 그리스도와 그 안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있는지.

Barclay, William, 1958, The Mind of St. Paul, Harper and Row Publis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