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당신과 가는 길

문상

우리나라 정서상 다같이 고생하는 차에 바쁜 시간 쪼개서 와준 분들에게 식사 대접이라도 꼭 하고 싶은 상주의 마음이기 때문에, (오늘처럼) 뭐 잘못해서 밥도 못 얻어 먹고 쫓겨날 때 한끼 해결하기에 좋기도 하나, 어떨때는 일정이 엉켜서 소화가 덜 된 상태여도 성의를 생각해서 한 숟가락이라도 떠야 하고 한편으로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에서 문상이라는게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자리라기 보다는 그간 너무 바빠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얼굴보고 반가워하는 동문회의 자리이므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한편 이해가 되면서도, 죽음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상주와 얘기꽃을 피우는 문상객의 모습은 상당히 패러독시컬하다.

온갖 역사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와 경제성장을 위해 쉴틈없이 개고생한 피로로 인한 온갖 짜증을 약자인 자식을 대상으로 풀어버린 당신들이 한편으로는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모의 죽음에 깊이 슬퍼하고 그들의 존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여기, 이땅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은자들의 이야기꽃에서도, 웃음소리 안에도, 쌓여있는 맥주 캔 옆에서도 가라앉은  슬픔은 숨길 수 없다.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부모에 대한 안타까움일까 무거운 삶은 돌아간 자나 남아있는 자에게 모두 동일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큰 죄 짓지 않고 조용히 돌아갈 수 있기만해도 성공한 삶이겠지. 원한이 아닌 인연만 남기고 갈 수 있어도 감사한 삶이겠지.

나의 생각이란

포맷이 다르면 정보 또는 지식의 성격이 상당히 달라진다. 주요뉴스는 프린트해서 옆에 놔두거나 저장해놓는 경우가 드물다. 그리고 점점 더 드물어지는 것같다. 몇 가지 정보나 가십성 이야기거리 외에 사실 별로 얻는 것이 없다. 페이스북에 연결되는 링크는 다분히 narrative이고 스토리가 있다. 오래 살아서 소재가 친숙하고 흥미롭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의 전개가 궁금하고 재미를 느끼는 형태의 정보소비이다. 정독을 위해 분류해놓은 블로그들은 프린트하여 읽거나 컴에 폴더를 따로 만들어서 아티클 전체를 저장해놓을 정도로 고차원적인 지식인 경우가 많다. 현상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으나 진정한 원리에 대해 깨달음을 준다.

포맷이 지식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은 생각에 대하여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언어가 관념을 지배한다. 사고를 할 때 언어를 통해서 사고한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생각할 수는 없다. 관념에 어떤 언어를 배치하는가 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생성되고 달라진다. 이미지와 의미, 해석이 이해에 선재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언어가 선재하고 이를 이용하여 현상을 개념화하기 때문에  내가 이미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관에서 벗어난 사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는 사실 자신의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에 의한 해석인 것이다.

글을 읽다보면 다분히 이해가 아니고 해석의 영역의 문제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이런 이유로 이런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은 세계는 언어화된 관념이 나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지, 내가 사고를 통하여 어떤 관념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연과 사회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사회현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성격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으면 이런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되기 쉬운 것같다.

약함의 영성

약함의 의미

 

약함이란 무엇인가. 약함과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르게 만드신 것을 뒤틀어 버리고, 지혜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휘어 버리며, 아름다운 모든 것을 흩트려 버리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타락한 세상에 그저 살고 있기 때문에 약하고 고통당한다.

한편 연약함은 성경에서 중요한 이미지이다. 성경의 진리의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된 기독교인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 전반에 약함이 하나님의 주된 방법임을 보여주는 다양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고난받는 메시아의 약함과, 외부로부터 구원자가 필요하게 만드는 우리의 죄성에 기인하는 약함, 세상 권세들에 대한 우리의 상대적 약함, 그리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약자를 환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공동체적인 우선순위가 있다.

우리는 약하고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 의로움을 위해, 가끔 연약함으로, 또 세상의 부조리로 인해 고통과 약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은 고통과 약함의 의미를 깨닫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약함과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약함을 무엇인가의 수단으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으며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앞에 벌거벗고 고통받게 될 때, 자신의 의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인식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오직 약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므로 가난과 약함을 선택한 신앙적 결단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의 어려운 시기를 견딘다.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투쟁하면서 발생하는 하나님으로 인해 약함의 입장에 서게 된다는 설명이다. 원칙을 지키면서 겪게 되는 약함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종종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 때 약함이 찾아온다. 세상의 조직적인 악의 제도와 불의한 사람들로 인해 때로는 옳은 일을 정의로운 방법으로 수행하려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으로 보이고 그런 일을 시도하는 것은 약함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그 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지켰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갖게 되는 영생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함을 가지고 선한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약함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는 목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약함으로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약함으로부터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약함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장소이다. 약함을 벗어나 강해질 때를 위해서 견뎌야 하는 임시적인 고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축복의 자리가 고통과 연약과 낮아짐의 자리라는 것이다.

약함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용서의 마음과 온유의 마음, 더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이 계획한 원래의 성숙한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또한 세상의 질서 때문에 겪게 되는 약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삶으로서의 설교가 되며, 삶으로서의 예배가 되기 때문에 영광의 모습으로 우리를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함과 번영과 형통함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약함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며 약함을 위한 장소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과 약함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를 이겨내면 얻게 될 강함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약함을 선택하였으므로 기뻐하는 것이다.

 

구속사와 약함의 자리

 

구속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며 구속사는 신약과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성취되고 구속사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의해서 완성된다. 구약성경 전체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고 신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 약자의 질서와 강자의 질서의 충돌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에게 명백한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노예상태로 지배받고 있다. 이스라엘을 통해 전수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 충돌하며 탄압받고 멸시받는 약자의 나라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강한 힘과 권력을 얻기 위해 집단의 동원을 추구하는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약해보이는 나라이지만 그 안에 당신의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련의 이적들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주려고 하시지만 이스라엘마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강자처럼 보이는 세상의 질서에 편승하고 노예의 삶에 머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은혜로 주어지는 약해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강자의 질서에 머무려고 하거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지 않고 강자의 나라를 부러워하고 한편으로 추구하였다는데에 있다. 강자의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약자들에 의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배척하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배를 받거나 지배를 하거나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추구하거나 세상의 나라의 질서를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지속적으로 강자의 질서를 추구하였고 세상의 질서의 일부분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야망을 좇아갔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가난한 자를 특별히 취급한다는 것임을 이스라엘과의 관계의 핵심인 법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의 법이 약자를 특별히 대한다는 내용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힘을 추구하는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법은 부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기보다는 종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였으며 이민해온 자들과 과부들, 고아들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약하고 영향력이 없는자를 옹호하였으며 그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공동체의 정신은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가장 많은 생산력과 군사력을 창출하는데 있지 않으며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고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는 약한 사회를 추구하는데 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의 노예생활과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상상하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고대하며 견디고 단련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질서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투쟁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회복될 나라의 보존과 진전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려고 할 때 찾아오는 약함의 자리에 동참함으로써 민족 공동체에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불완전하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은 약함으로 아파함으로 고통당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 나라를 진전시켰다. 하나님의 방법은 공동체를 약함으로부터 건져 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약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뜻으로 본 한 민족공동체의 역사는 거듭되는 공동체의 반역에서도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로의 사랑의 초대이며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순종하는 신실하게 남은 자들의 응답이다. 그들은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 장소에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공동체가 결집하여 약함을 벗어나 강해질 때에 나타나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고통과 연약과 낮아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룬 공동체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

그리스도와 약함의 길

 

예수님의 생애는 약함으로 점철된다. 그가 태어난 곳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이었으며 누운 곳은 구유였다. 오랫동안 예수님이 가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 광야에서 사십 일을 지내시며 받은 시험은 경제적 힘, 존귀와 영광, 권력의 힘으로의 유혹이었고 이를 강하게 거부하신 일도 그의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중병환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죄의 사슬에서 환자들을 해방할 때 몰려든 사람들의 강함에 대한 요구에 조용히 피하신 일도 있었다.

예수님의 정신과 삶의 정수인 십자가의 죽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운명의 순간까지 강함에 대한 유혹을 이기시고 가장 약한 모습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참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셨다. 십자가의 약함을 수단으로 인간이 구원을 얻게 하시고 인류 역사에 뻗어내려 있는 악의 뿌리를 이기셨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장 약한 상태의 죽음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약해보이는 예수님의 철저한 수모와 패배의 삶은 약함으로써 비로소 강함을 이기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세상의 질서는 강한 힘으로 이 땅을 지배하고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지만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승리하였고 환희의 부활을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지고 형벌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약함의 길을 걸음으로써 정사와 권세를 폐하여 십자가로 승리하셨다”(2:15). 이로서 예수님은 사탄의 질서를 파괴하시고, 죽음을 이기셨으며 죄의 권세를 정복하셨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하였을 때 사단이 다스리고 있는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 간 인간을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는 고난과 죽음을 즐겁게 선택함으로써 얻어지는 약함의 참 승리였다. 예수님은 순간마다 강함에 대한 유혹을 받으시면서도 고난과 죽음을 통해 약함의 길의 참의미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길로 초대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그리스도와 그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약함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알기 때문에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도 그 길을 걷는다. 약함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구원이 계획을 따라갈 때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어 갖게 되는 부활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약함을 가지고 선한 싸움에 임하는 것이다. 부활로써 그리스도의 상처가 치유와 구원의 샘이 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까지 감수하며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충실할 때 승리를 얻고, 약함을 기쁨과 부활의 원천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 속에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1:24) 이런 관점에서 약함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하는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마다가 자기 자신의 약함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에 참여한다. 약함으로 아파할 때, 고통당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며, 아파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의 질서를 물리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며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협력하도록 허락받는다.

만약 우리 삶의 목적이 예수님을 닮고 삶 속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면 약함십자가를 즐거워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친히 세상의 모든 약함을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8:17).

예수님의 약함의 길을 좇은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받는 종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약함을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원천으로 삼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었다.

그 길은 힘든 길이다. 그러나 약함의 길 위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도 약함의 정신을 붙잡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며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가난하고도 약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약해도 약해지지 않고 강해도 강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약함

 

약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나라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결국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전복시키며 재창조한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약해보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을 변화시켜 죽음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생명으로 창조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창조와 변화의 능력은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이 아닌 현실이며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능력이다.

약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이 나라는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해 무력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해준다. 오직 고통과 약함을 경험할 때에 약함의 영성, 고통이 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약함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전적으로 그분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에 기초하고 있음을 일깨워주며 전적으로 그 은혜에 의지할 때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인식조차 못하는 우리에게는 약함의 영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지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무력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창조의 능력을 먼저 경험한다.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며, 폭력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반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약함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와 약함 가운데 있는 은혜를 증거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이다.

고통받는 불행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고통에 참여하며 하나님 나라의 창조의 능력을 특별히 경험하며, 약함의 영성을 통해 자기의 약함을 수용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의존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자들을 통해서 가장 잘 역사했으며, 교회의 능력은 약함을 통한 능력(고전 1:18~2:5)이었다.

약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나라의 재창조는 약자와 약자들 사이의 참된 관계성의 회복으로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결국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이루어진다.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삶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 약함을 경험함거나 약함을 경험한 지체들로부터 은혜를 전수받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공동체에 가장 귀중한 지체들이다.

교회는 약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의 근원적인 원리를 깨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며 우리 삶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돕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위로의 침묵으로 함께 있어주는 가난하고 어려운 곤경 앞에서 신뢰와 도움의 실천으로 서로의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약자들의 연대를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 바니에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이 우리 곁에 있어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구원해야 할 선한 자들이 바로 우리라고 착각하는 권력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약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가장 잘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은 장애인과 고난 받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비전인 하나님 나라는 타인의 고통과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에서 구현될 수 있으며 약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 명예, 권력을 향해 강함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공동체도 상처입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약함으로 내려가는 일이 평화를 찾고 참된 인간이 되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오직 이 길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숨기고 내보이지 않는 가장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지체들이 진정으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가?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실제로 그렇다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장 바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p.81)

식민지 없는 발전

식민지 없는 발전은 세계사적으로 한국과 대만과 중국밖에 없다. Age of Innocence의 가면을 쓰고 있는 모든 국가들은 사실 학살과 강간과 착취로 획득한 부에 기반한 사회이다. 식민지 수탈 기반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부의 원천은 대부분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당분간 연간 3500시간 노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노동이라는 고통과 함께 하는 떳떳함을 선택할 것인가, 힐링이라는 가면 속의 쾌락을 좇을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모든 신과 영웅이 보여준 삶의 모범은 우리를 논쟁이 필요없는 유일한 숙명으로 이끌 것이다. 저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학살과 강간과 착취의 힘을 부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신적 정의와 영웅의 용기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악마화

타자를 악마화하는 모습은 인간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고 특히 우리나라 종교와 정치에 만연되어 있다. 이는 증오가 주는 자기우월감과 타자의 파괴라는 정복감이 주는 쾌락이 만만치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느낌은 소외의식에 빠져있는 노인과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더 큰 호소력이 있는 것같다.

무엇을 내세우든 평화를 위한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어떤 인간이나 조직도 타자를 악마화하는 순간,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 침략과 전쟁, 반목과 폭력, 학살과 강간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 되고 곧 악마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를 거스르는 평화의 나라는 겨자씨만한 것이어서 거의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불완전한 힘으로 얻을 수 없으며 고통받고 억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이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야 하는 보물이다.

참되고 바르게

참되고 바르게

기획기사

기획기사 1

어그러진 세상에서 자유의 누리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 8:36)”

자유를 잃은 사람들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의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권리를 즐기는 21세기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커져가는 경제적 불평등, 재난과 자연파괴, 소외와 갈등으로 불안과 억압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땅에서도 경제적 불확실성, 공포의 시대, 급속히 늘어나는 폭력적 오락,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개인적인 성취를 달성해야 한다고 하는 풍조는 우리를 끝없이 누르며 억압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18-19)”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이 말씀이 자신으로 인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

포로되고 눈이 멀고 억눌린 사람들, 자유를 잃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신 것이다.

어그러진 세상의 질서

출애굽하기 전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권력이 정해놓은 벅찬 노동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소망 없이 경쟁하며 지배와 억압 속에 생존만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당시 이집트의 지배 시스템 안에서 공의와 정의는 무시되었고, 기득권 층의 이익을 보호되었으며, 힘없는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를 당하며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질서는 오늘날 예전보다 더 공고하고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경제체제는 불안정하고 불공정하며 시스템 안에서 무한정한 경쟁의 장이 확대되고 있고 지구의 기후적인 그리고 생태적인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국가와 민족 간의 갈등과 충돌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정치가와 정치제도는 공공선을 따르는 권력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그치고 있다. 사회 내에 인간과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 세계관에 의한 질서가 지속되고 있으며 사회적 약자, 여성, 아동, 태아의 삶이 보호되지 않고 있다. 문화는 인간의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며 쾌락과 탐욕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중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강자가 약자를, 약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세상

 

세상의 질서 안에는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와 강자에게 착취 당하는 약자, 자신의 약함을 이겨내기 위해 더 약자를 착취하는 약자가 존재한다. 강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약자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힘쓴다. 더 나아가 강자는 약자가 자기에게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약자들을 대립시키고 약자들도 자신을 지킨다는 허울 아래 더 약한 사람을 또 다른 형태의 착취를 통해서 억압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혹은 지키기 위해서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사실 싸움의 한복판에는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며 고달픈 삶을 힘들게 꾸려가는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약자를 착취하는 억압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강자는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착취당하는 약자들의 존엄성 상실도 비참하지만, 착취하는 강자들의 인간성 파괴도 심각하다.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잃어버리고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비하하고 그런 황폐함마저 느끼지도 못하도록 스스로를 무감하게 만든다. 공감과 나눔의 인간은 그런 황폐함을 견디어 낼 만큼 독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하게 된 세상의 자식이 되고 만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자와 약자는 어디선가 싸우고 있을 것이며 동시에 스스로와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소외하고 상처받고 고통당하고 있을 것이다.

악의 쾌락을 즐기는 사람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의 욕망까지 죄의 권세 가운데 내어주고 말았다. 우리가 경쟁에 이겨서 일시적인 우월감과 안정감을 누리든지, 여전히 경쟁 속에 허덕이며 패배감과 궁핍함을 살든 결국 죄된 세상의 죄된 욕망의 지배 하에 놓이고 말았다. 교만, 탐욕, 시기심, 정욕, 탐식, 나태, 분노라는 일곱 가지 죄가 인간에게 주는 악의 쾌락에 사람들은 빠져있다. 교만은 자기도취나 과대망상뿐 아니라 자기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는 모습과 성취감으로 탐욕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시기심은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을 동경하고 증오할 대상을 무시할 때 느끼는 우월감으로 나타난다. 정욕과 탐식은 파괴적인 쾌락으로, 나태는 무기력감을 즐김으로, 분노는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공격과 통제의 우월감으로 인간에게 쾌락을 준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파괴시키는 악의 쾌락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의 초대

 

예수님의 복음은 이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어그러진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누리로 나오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기쁜 소식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경쟁의식, 이웃과 사회의 고통과 이에 대한 무관심, 죄책감과 불안, 자기파괴의 고통,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집단적 흥분과 쾌락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이러한 죄의 권세와 세상의 질서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한다. 이로써 우리는 강자의 교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고 약자의 비애로 인하여 다른 약자를 착취하는 불안감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며 당당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소명에 따라 살 수 있다.

예수님의 복음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그러진 질서와 그릇된 세계관로부터 자유의 누리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가식적이고 허위적인 자유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 초대하신다. 불안과 억압의 압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초대에 소망을 갖게 된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어떠한 대가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기획기사 2

완성을 향해가는 자유인의 삶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이사야 65:17-18)

자유를 얻은 노예

 

하나님께서는 죄된 권세와 욕망 아래 자신을 내어주며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내심으로써 그들이 죄된 권세와 욕망 모두에서 떠나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경배하며 그분의 통치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셨다.

자유를 얻은 노예는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 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풍성함을 얻었고 더 이상 이집트의 지배 시스템 안에서 착취당하거나 다른 이들을 이기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이제 죄의 포로가 아닌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아직 만나를 저장하거나 안식일에도 만나를 찾으러 나가는 헛된 수고와 죄된 욕망의 포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다스리심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로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피흘림이 없는 정의로운 나라, 다툼이나 그로 인한 상처가 없는 나라,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없으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압제하는 일이 없이 정당한 땀의 대가가 있는 나라이다.

완전히 회복된 새하늘과 새땅,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나라는 깨졌던 모든 관계가 회복되는 완전한 평화의 나라이다. 평화로운 나라는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의 자유를 누리며, 생명이 풍성하고 더 이상 다툼과 아픔과 상처가 없는 나라이다.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고 염려와 두려움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 약육강식이 없고 거짓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삶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순간적인 쾌락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기뻐 할 수 있는 희락의 나라이다.

회개와 용서와 연대의 관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회개와 용서와 연대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음과 삶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다른 제자들과의 새로운 친교의 삶 안에서 그 용서받음을 실천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를 비는 회개는 관계의 문제를 직접 제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늘 인간들 사이의 관계 회복과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 이상 착취와 억압의 관계가 아닌 용서와 사랑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와 변화된 삶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점에서 용서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다.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 모두를 위하여 얻어낸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

용서는 하나님 백성의 연대성의 회복을 가져다 준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그리스도인을 형제와 자매로 만들고 모든 인류를 형제자매 공동체로 바꾼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의 일치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성숙한 사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단순하고 평화롭게 살며,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고, 사람들을 섬기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좇아산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참된 뜻을 이루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고 평화롭게 하며 산다.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죄의 문제를 사랑과 화해·연대의 관계회복 문제로 해결하는 참된 신앙인으로 산다. 그리스도의 자기부인과 자기희생을 삶의 모범으로 삼고 그를 따르는 삶을 산다. 성숙한 도덕적인 목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완전히 구현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사는 사람들로 변화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산다.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며 삶의 전 영역을 변혁한다. 이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연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인과 세리와 죄인, 창녀들에게도 와서 함께 먹자고 부르신다. 하나님 나라는 고달픈 세상의 억압에서 나와 누구든지 정의와 평화와 희락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다.

누구나 육신의 양식을 뛰어 넘어 생명의 양식인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된 권세와 죄된 욕망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자유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희락의 나라, 용서와 화해의 형제자매의 공동체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영원히 기뻐하며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기뻐한다. 이 초대에 당신은 응답하겠는가?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이사야 65:18-19)

 

 

 

기획기사 3

 

진정한 자유를 살아가는 길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서 1:8-9)

우리는 어떻게 자유의 삶을 살아가는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타락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자유는 우리 개인 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유 없이 고통 받는 이웃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피조물들도 자유케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롬8장), 죄의 권세에 속박된 세상에 그리스도의 자유가 선포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안락함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삶일 것이다.

우리는 죄된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자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직은 고난받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으며 성령으로 하나되는 공동체 안에서 자유의 삶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

고난받는 자유의 나라를 위해

 

거룩함을 지키고 이웃을 생각하고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흐름에 저항하며 사는 삶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세상의 나라에 의해 핍박받고 억압받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세상 나라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 억압과 압제로 인간을 통치하는 세상의 나라는 인간의 해방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고난은 무의미한 고난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며, 고난으로 인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현재화한다. 예수는 그에게 닥칠 죽음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같이 하나님 나라도 고난에도 불구하고 점점 퍼져가며 세상의 나라를 이를 이길 수 없다.

성령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로

하나님의 나라의 자유는 공동체 안의 관계를 통하여 경험하고 구현할 수 있다. 공동체는 세상 나라의 조작된 욕망, 조장된 불안에서 서로를 해방시키며 함께 살리고 의지하는 관계에 대한 거룩한 욕망을 낳는다. 우리는 겸손, 온유, 인내와 용서의 마음으로 공동체의 하나됨을 추구할 때 참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고난을 기쁨으로 이기며 죄인들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한 마음이 되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때 참 자유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성령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통해 자유를 누리고 자신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공동체를 말한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세상나라의 악을 직면할 때 적극적으로 악에 저항하되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극복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성령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누리는 공동체이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감싸주고 사랑하며 함께 자라가며 함께 누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참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따라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낡은 삶은 포기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세상의 죄와 유혹의 권세 속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함을 지키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설 여지를 만들기 위해 충만히 살아있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우리 자신을 열어 진리의 성령을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한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바빌론의 권세로부터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왕궁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는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개인적인 선택인 동시에 바빌론으로 대표되는 세상 권세에 저항하는 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우리도 죄된 권세와 죄된 욕망을 버리는 선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자유케 될 수 있다. 잘못된 구조의 수혜자로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억압당하면서도 보지도 바꾸지도 못했던 삶에서 돌아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우리를 해방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 충만되고 통일되는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

 

고난받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해 사라진 것같이 보였지만 예수는 부활시켰고 이로 인해 세상의 나라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세상의 나라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들도 이제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이미 죄인일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유의 길이 열렸다.(롬5장) 그는 일생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이 나라로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하고 그 나라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제 누구든지 이런 예수를 만나고 이런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때 그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됨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온 세상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될 것이요(골3:11), 통일될 것이다.(엡1:10) 인간은 이 계획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응답해야 하며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야 한다.